성장과정 통해 인간의 원초적 본질 탐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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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 Books 편집장

요즘 유행하는 젊은이들의 구두가 수상합니다. 마치 동화 속의 마귀 할멈이 신고 나오는 구두처럼 앞 부리가 길고 뾰족하기도 하고, 필경 텅 비어 있을 앞 부분이 턱없이 길게 앞으로 비어져 나와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 앞 부리가 뭉툭하면서 길게 뻗어나온 것을 '바퀴벌레 슈즈'라고 한다는군요.

제 생각과는 다르지만, 그것도 그들 사이에는 뭔가 멋을 내기 위한 것일진대, 하필이면 그 이름을 바퀴벌레라고 지었는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퀴벌레는 그저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하는 지겨운 벌레일 뿐이잖아요. 80년대 후반 쯤에는 바퀴벌레를 소설의 제목으로 내세워 관심을 끌었던 소설이 있었지요.

이승우라는 소설가를 제가 처음 만나게 바로 그 소설, 〈구평목씨의 바퀴벌레〉였습니다. 이 소설은 자동판매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다가 입안에 스물거리는 바퀴벌레를 느끼면서 말문이 막히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도대체 구역질이 나서 다시는 주변의 자동판매기에 동전 집어넣기가 꺼려지는 그런 설정이지요. 그 소설은 이어서 감방에 투옥된 운동권의 젊은이가 밤마다 감방 안에 득시글거리는 바퀴벌레를 못견뎌 하면서 결국은 투항하게 되는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역겨워서 읽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소설이었지만, 스토리의 진지함이 책을 놓지 못하게 했고, 다 읽어치운 뒤에는 작가 이승우 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찾아든 책이 그의 데뷔작이었던 〈에리직톤의 초상〉이었습니다. 교황 저격 사건을 소재로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던 이 소설을 보면서 최소한 이 작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는 되지 않아도, 고정적인 매니아 독자를 가지는 작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가 다루는 주제가 대중적이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그런 이승우 님이 대산문학상 수상작을 낸 것은 의외였지요. 바로〈생의 이면〉(문이당 펴냄)이라는 장편이 그것입니다. 〈생의 이면〉은 이 소설의 화자인 작가가 박부길이라는 작품 속의 다른 소설가의 삶을 취재해서 하나의 전기 형식으로 완성시키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이야기는 고시공부에 몰입하다가 정신의 병이 들어 폐인이 된 아버지를 둔 어린 아이 박부길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무극사라는 절에 들어 고시공부를 하던 장래가 촉망되던 법학도였지요. 아버지에게 정신의 병이 든 것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생각한 집안 어른들은 어머니를 내쫓았고, 창졸간에 부모를 잃게 된 아이는 큰아버지 댁에서 살게 됩니다. 그 집에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감이 탐스럽게 열리는 감나무가 있는 뒤란이지요. 뒤란에는 골방이 있고, 그 골방에는 짐승처럼 골방에 갇혀 사는 몹시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어요. 그가 바로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친구도 없이 집안에 쌓인 책들을 모조리 읽어 치우며 생활하던 아이는 뒤란의 짐승같은 남자가 죽은 뒤에야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지요. 그리고 열 다섯이 되던 어느 날, 아이는 자신의 책과 노트를 불쏘시개로 하여, 아버지의 무덤에 불을 지르고 가출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문학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부성 부정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출한 아이는 도처에 위험이 깔려 있고, 아무도 우호적이지 않은 도시에서의 떠돌이 생활을 시작합니다. 소년 박부길은 만화방 점원에서 중국집 배달원 노릇도 하다가 어렵사리 쫓겨났던 어머니를 만나게 돼,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됩니다.

고등학교 시절 동안의 박부길을 작품 속에서는 "숱하게 많은 서클 가운데 그 어느 하나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단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그를 동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외톨이 상태를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그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 다가가면 그는 잔뜩 긴장하고 뻣뻣해진다"(이 책 97쪽)고 그렸어요. 소설 속의 박부길은 생래적인 외로움을 달고 다니는 인물이지요.

그는 한강 이쪽에서 저쪽까지 걸어서 건너 다니며 그 깊은 외로움을 이겨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외로움이라는 본성은 떠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것은 게걸스러운 책읽기 뿐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비오는 날,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다가 교회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되고, 피아노를 연주한 연상의 여인을 향한 집요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은 결국 박부길을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했지만 그녀가 유학을 떠나면서 박부길은 다시 또 깊은 상실감에 빠지게 되지요. 한참 뒤에 박부길은 그녀의 귀국과 결혼 소식을 듣게 되고, 신학대학을 포기하고 소설가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게 이 소설 〈생의 이면〉에 나오는 소설가 박부길의 일생입니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로 읽힙니다. 박부길의 선병질적인 청년 시절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면서, 한 소년이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승우 님 외에도 성장 소설을 쓴 작가들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의 이면〉은 단순히 성장과정의 에피소드들을 나열함으로써, 흥미롭게 읽게 한 다른 성장소설들과 좀 다릅니다. 그의 대부분의 다른 소설이 그러하듯, 신화의 본질, 즉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소설 속의 청년 박부길에게 부여된 생래적인 외로움 역시 인간의 원초적 고독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최근의 소설들에서 서사를 찾아보기 어렵다고들 합니다. 극적인 스토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 인간의 성장과정과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원초적 고독에 대한 탐구는 이승우 님만의 독특한 성과라 생각하게 됩니다.

〈생의 이면〉이후로 그의 매니아 독자들의 기대에 조금 못 미치는 소설 몇 권을 더 내놓았던 이승우 님이 요즘 별다른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어요. 창작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중이겠지요.

▶이승우 님이 펴낸 소설들

* 생의 이면 (문이당 펴냄)
*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고려원 펴냄)
* 사랑의 전설 (문이당 펴냄)
* 따뜻한 비 (책나무 펴냄)
* 황금가면 (고려원 펴냄)
* 목련공원 (문이당 펴냄)
* 미궁에 대한 추측 (문학과지성사 펴냄)
* 세상밖으로 (고려원 펴냄)
* 일식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펴냄)
* 에리직톤의 초상 (살림 펴냄)
*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문이당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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