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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김승유, 박수 치며 보내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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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정재
경제부장

하나은행의 별명은 HSBC은행이다. HSBC는 한때 세계 최대 은행이었다. 하나(H)가 인수합병한 서울(S)·보람(B)·충청(C)은행의 영문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하나는 10년 새 이들 세 개 은행을 인수했다. 하나의 역사는 인수합병의 역사다. 단자회사에서 은행으로 전환한 뒤 충청은행에서 외환은행 인수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을 일궜다. 1991년 자산 1조3000억원짜리가 366조원으로 20년 만에 약 280배 커졌다. 세계 금융사에도 예를 찾기 어렵다. 그 중심에 김승유 회장이 있다.

 그는 올해 69세다. 마지막 숙원 사업이 외환은행 인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하나금융이 4대 금융지주 중 꼴찌라는 사실을 못내 못 견뎌했다. 하나가 꼴찌로 밀려난 데는 본인 책임도 꽤 있다고 여겼다. 인수합병의 귀재라는 그지만 조흥은행·LG카드 인수전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두 개의 인수전에서 이긴 라이벌 신한금융은 그새 멀찌감치 도망갔다. 그러나 승부사 김승유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절치부심 끝에 자산 130조원의 외환은행 인수를 사흘 전인 27일 마무리했다. 하나금융은 단숨에 4대 지주 중 2위가 됐다.

 당장 김 회장의 거취 문제가 금융권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는 사석에서 “외환은행 인수 승인이 나면 바로 용퇴하겠다”고 말해왔다. 감독 당국에도 그런 뜻을 전했다. 그만큼 외환은행 인수에 올인한다는 의지였다. 당국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뜻도 담겼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막상 고대하던 인수 승인이 떨어진 27일 그는 말끝을 흐렸다. “회장추천위원회에 적임자 선출을 맡겼다”고만 했다. “사퇴한다는 얘기냐”는 기자의 질문엔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비켜갔다.

 갑자기 그의 말끝이 흐려진 이유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김 회장은 일주일 전 윤용로 부회장 등 고위 임원들을 불러 “27일 인수 승인이 떨어지면 용퇴 발표를 하겠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자 임원들의 만류가 잇따랐다. “김종열 지주 사장도 사퇴를 밝혔는데 회장까지 물러나면 두 은행의 통합을 끝낼 사람이 없어진다”는 논리였다. 김 회장 방에는 “1년이 아니면 반년, 3개월이라도 계셔 달라”며 퇴진을 만류하는 임원들이 줄을 이었다는 후문이다. 듣기 따라 훈훈한 미담일 수 있다. 하지만 꼭 1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3월로 임기가 끝나는 김 회장은 “물러나고 싶다”고 했다. 막 외환은행 인수 계약을 성공시킨 후였다. 그러자 임원들은 “외환은행 인수 및 통합 작업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며 말렸다. 결과는 김 회장의 연임이었다. 금융가에선 ‘짜고 친 고스톱 아니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문제는 김 회장의 연임을 바라는 임원들의 속마음이다. 김 회장과 하나금융을 위한 충심인지 자기 자리 보전을 위한 욕심인지 헷갈린다. 따져보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총선·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이다. 김 회장의 연임은 하나금융에 부담을 안길 가능성이 더 크다. 민주통합당과 외환은행 노조의 타깃은 김 회장이다. “왜 외환은행을 하필 MB 친구에게 줬느냐”는 공세가 그것이다. 김 회장은 MB와 고대 동문이자 친구다. 김 회장도 이런 오해의 시선을 잘 알고 있다. 마침 외환은행 인수 승인이 떨어진 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사퇴했다. 그의 사임사가 공교롭다. 최 위원장은 “저로 인해 조직 전체가 외부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당해선 안 된다”고 했다. 김 회장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하나금융의 승승장구는 선대 윤병철 회장의 용퇴에서 시작했다. 1997년 윤 회장은 은행장 자리를 과감히 김승유에게 물려줬다. 이번엔 김 회장 차례다. 한국 금융은 후계문제로 속앓이를 많이 했다. KB·신한지주가 차례로 내홍을 겪었다. 그뿐이랴. ‘1%대 99%’-혼자만 배불리 누린다는 따가운 시선도 많다. 절정의 순간, 다 이루고 떠나는 ‘한국 금융의 사표(師表)’가 절실한 때다.

 삼국지엔 ‘때를 아는 자가 영웅호걸(識時務者爲俊桀)’이란 구절이 나온다. 주로 물러날 때를 알라는 뜻으로 쓰인다. 한국 버전으로 풀면 이렇다. ‘박수 받을 때 떠나라.’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진정 김 회장을 아끼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