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평가와 표현의 자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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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29면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미국 콜로라도주 제퍼슨카운티 교육청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적이 있다. 1999년 무디스는 불공정한 평가로 교육청의 채권 발행을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교육청이 신용평가를 의뢰하지 않았는데도 공개 자료 등을 활용해 신용등급을 매겨 공표했기 때문이다.

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이른바 ‘무의뢰 신용평가(unsolicited rating)’를 한 것이다. 교육청은 채권 평가를 다른 신용평가사에 맡긴 데 대한 보복으로 무디스가 일부러 낮은 신용등급을 공개했고, 그 바람에 채권 발행가가 떨어져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못 먹는 남의 밥에 재를 뿌렸다는 얘기다.

하지만 주(州)법원과 연방법원은 무디스의 손을 들어줬다. 신용평가사의 등급 판정은 ‘의견’일 뿐이므로 수정헌법에 따른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이유였다.
무의뢰 신용평가로 발행자들을 압박하는 것에는 정말 문제가 없는 것일까. 여러 연구는 수수료가 오가는 통상의 의뢰 평가보다 대가가 없는 무의뢰 평가 때 신용평가사가 박한 등급을 부과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등급을 후려쳐 겁주고, 일감을 주면 후한 등급으로 보상했다는 풀이가 나올 법하다.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은 신용평가사들. 글로벌 위기 이후 연거푸 ‘등급 강등’이란 불화살을 날리고 있다. 지난 13일 프랑스·오스트리아 등 9개 유로존 국가가 한 방 세게 먹었다. 지난해 8월에는 기축통화국 미국이 당했다. 세계 각국의 금융사와 기업 중에도 얻어맞은 곳이 수두룩하다.

당한 쪽에선 한결같이 울화통을 터트린다. 기업이나 국가가 속병이 들 때는 팔짱 낀 채 모르쇠로 있다가 하필 사태 수습 국면에 들어설 무렵 죄책감이라도 덜려는 듯 과잉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심술보가 하나 더 붙은 오장칠부의 놀부 같다’고도 한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이 앓는 놈 뺨치기, 다 된 흥정 깨놓기…. 그래선지 올 들어 신용평가사 개혁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그렇다면 심술 부리는 신용평가사는 갑(甲)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일까. 수익 구조를 놓고 보면 꼭 갑이라고 볼 것도 없다. 원래 신용평가사는 신용등급을 열람하는 투자자로부터 수수료를 챙겨야 한다. 투자위험 정도를 알려주는 대가다.

하지만 70년대부터 수수료는 금융상품을 만드는 기업·정부가 내는 ‘발행자 지급방식(issuer pays)’으로 바뀌었다. 등급을 후하게 매겨줄 신용평가사를 발행자가 골라 잡는 ‘신용등급 쇼핑’이 판치게 된 배경이다. 글로벌 위기 직전 모기지 파생상품 등 발행자가 ‘등급 쇼핑 유혹’에 쉽게 빠졌던 구조화 상품의 평가에서 신용평가사는 전체 수입의 40%를 벌어들였다. 종전보다 더 발행자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작 중요한 투자자 보호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쯤 되면 등급 강등 화살을 날리는 신용평가사의 진짜 속셈이 뭔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줄어든 일감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영업상 압박하고 있는지, 아니면 부도 상태나 다름없는 고객(정부)을 봐주며 신용등급을 살살 낮추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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