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년 기다려야 직장 선택의 자유 ‘화려한 노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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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19면

팀을 이탈했다 돌아온 최희섭(오른쪽)이 18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팬들에게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자리를 뜨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지난주 프로야구는 최희섭(33·KIA 타이거즈) 문제로 시끄러웠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장타자 최희섭은 팀을 떠나고 싶다며 열흘 동안 잠적했고, KIA는 최희섭을 넥센 히어로즈에 보내고 다른 선수를 받으려다 실패했다. 두 팀 간 협상이 결렬되자 선수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희섭은 지난 18일 KIA 구단과 선수단에 사죄하고 돌아왔다.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면 야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헌법에 보장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최희섭에겐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직업인’으로서 프로야구 선수는 철저한 약자다.

‘최희섭 사태’로 본 프로야구 선수의 열악한 신분

최희섭의 잠적이 길어지자 KIA는 두 가지의 압박카드를 꺼냈다. 임의탈퇴선수 또는 제한선수로 공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선수가 뛰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을 때 구단은 임의탈퇴선수 공시를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요청할 수 있다. 임의탈퇴선수가 되면 국내 다른 팀에서 뛸 수 없다. 원 소속팀에 돌아오려면 최소 1년이 필요하다. KIA가 최희섭을 임의탈퇴 처리했다면 최희섭은 월급 한 푼 못 받고 올 시즌을 통째로 날려야 했다.

임의탈퇴가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제도이기 때문에 제한선수 조항이 2000년 야구규약에 추가됐다. 선수가 개인적인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려 할 경우 구단은 KBO 총재에게 제한선수 신청서를 제출해서 허락을 받을 수 있다.

제한선수로 공시돼도 임의탈퇴와 같이 월급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선수와 소속팀이 원하면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일종의 ‘무급휴직’에 해당한다.
지난해부터 최희섭은 KIA 동료 및 팬들과 미묘한 갈등을 일으켰다. KIA에서 뛸 수 없다며 서울 팀 이적을 바랐다. 보통은 그래 봐야 트레이드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는다. 구단 간 트레이드가 실패하자 최희섭이 뛸 수 있는 국내 팀은 KIA밖에 없었다.

원칙만 따진다면 최희섭은 억울할 수 있다. 프로야구 선수에게 1월은 비활동 기간이다. 1월은 야구 규약상 훈련이나 경기가 금지됐고, 따라서 월급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팀 훈련을 이탈한 것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졌다. 마음대로 팀을 떠날 수 없는 최희섭에게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고교나 대학을 졸업한 선수는 드래프트(draft) 절차를 통해 프로선수가 된다. 순번에 따라 각 구단이 원하는 선수를 결정하는 것이다. 드래프트의 원뜻이 징집인 만큼 선수에게 선택권은 없다. 자신을 지명한 구단에 입단하거나 이를 거부하면 국내에서 뛰지 못한다. 월급쟁이로 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사할 회사가 정해지는 셈이다. 재정 상황이 나쁘거나 해당 포지션 경쟁이 치열한 구단으로부터 지명을 받는다 해도 한숨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대신 프로선수는 입단 계약금을 받는다. 적게는 수천만원, 많게는 10억원(2006년 KIA 한기주)의 계약금을 구단이 선수에게 주는 대신 보류권(독점계약권)을 갖는 것이다. 프리에이전트(FA)가 되기 전까지 선수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트레이드될 수도 있고 방출될 수도 있다. 연봉 계약의 주도권도 사실상 구단에 있다. 유명 선수들은 구단과 마찰이 있거나, 연봉 계약에 문제가 있을 때 “팀을 떠나겠다”고 호기를 부린다. 그러나 뜻대로 ‘이직’에 성공하는 선수는 거의 없다. 홍성흔(35)은 2007년 말 두산과 갈등하다가 1년을 버틴 뒤 FA가 돼 롯데로 이적했다. 장성호(35)는 2009년 KIA에 트레이드를 요구하다가 이듬해 6월에야 한화로 떠났다. 그나마 이들은 인기와 실력을 갖춰 여론을 등에 업고 구단과 대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팀을 옮기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입단 후 9년(대졸 선수는 8년)을 채워 FA가 되면 선수는 비로소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 정금조 KBO 운영부장은 “지금 FA 제도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가 부각되고 있지만 2000년 제도를 도입할 때 취지는 그게 아니었다. 일정 자격을 갖춘 선수에게 팀을 선택할 자유를 주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FA 자격을 얻으면 선수는 계약 주도권을 빼앗아오게 된다. 한화 김태균(30)은 2009년 연봉이 4억2000만원이었다. 그가 FA가 돼 일본(롯데 마린스)에 가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한화로 돌아왔지만 2012년 그의 연봉은 무려 15억원으로 치솟았다. 뛰어난 기량을 갖춘 선수가 선택권을 갖게 되면 몸값이 몇 배 뛰는 것이다. FA 계약을 한 선수는 4년 연한을 채우면 또다시 FA 자격을 얻는다. 2010년 은퇴한 양준혁(43·전 삼성)은 세 차례나 FA 권리를 행사하며 큰돈을 벌었다.

월급 받는 개인사업자
프로 선수는 아주 특수한 직업군이다. 반은 근로소득자, 또 반은 개인사업자 성격을 갖고 있다. 이들을 ‘월급 받는 개인사업자’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 선수들의 월급은 일반 샐러리맨과 다르게 지급된다. 프로야구 선수는 연봉의 10분의 1씩을 훈련·경기 기간인 2월부터 11월까지 나눠 받는다. 프로야구 선수는 실질적으로 구단에 고용된 형태이지만 여느 근로소득자와는 다른 급여지급 방식 때문에 개인사업자로 분류된다. 따라서 퇴직금이 없다.

프로야구 선수 평균 연봉은 1억원 정도다. 프로야구 선수들을 근로소득자와 직접 비교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FA 전까지 구단에 보류권이 있기 때문에 피고용자인 선수의 권리는 상당히 축소돼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FA 제도 보완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 선수가 FA가 되려면 최소 8년(대졸 선수는 7년)이 필요하고, 미국에선 6년이 걸린다. 스포츠 선진국에 비해 우리 선수들이 ‘계약의 권리’를 얻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길다. 프로 입단 후 꾸준히 1군에서 뛰며 FA 자격을 얻는 선수는 전체의 10%도 되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도 서른 살 전후에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다른 종목 FA 제도는 상대적으로 선수에게 유리하다. 프로축구는 올해 FA 연한을 5년(기존 3년)으로 정했고, 프로농구와 프로배구는 6년이다.
정금조 부장은 “프로 스포츠의 특수성 때문에 현행 계약체계가 만들어지고 유지됐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수정하고 있다”면서 “프로 초창기에는 선수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했다.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유리하게 개선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대졸 선수는 8년 만에 FA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갈수록 구단과 선수가 비슷한 힘을 갖고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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