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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비디오아트 켜두세요…써서 망가지는 것보다 안 써 생기는 손상 더 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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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작업실에 쌓아 둔 낡은 TV에서 치익 소리가 났다. 이정성(68)씨는 능숙하게 케이블을 연결하고 작동시켰다. 평생 해 오던 일, 그러나 그 안에 자기 얼굴이 들어간 건 처음이다. 손이 작아 피아노로 한 옥타브도 못 치던 백남준이 늘 부러워했던 이씨의 크고 재주 많은 손도 들어갔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백남준

그는 ‘백남준(1932∼2006)의 손’이었다. 1988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백남준의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을 세울 때부터였다. TV 1003개로 구성된 ‘비디오 탑(塔)’이다. 이후 백남준과 함께 세계를 누볐다. ‘백남준의 테크니션’ 이정성(68) 아트마스타 대표 얘기다.

 백남준의 주문은 까다로웠다. “미스터 리,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 봅시다.” 하지만 이씨는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눈을 감았다. 백남준 6주기를 맞아 이씨를 만났다. 올해는 백남준 탄생 80주년이기도 하다. 13일 오후 서울 공항동 이씨 작업실. 치킨집 위층 철문을 열자 브라운관 TV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영락없는 전파상이다. “남들 눈엔 고물이겠지만 내겐 보물이에요. 백 선생님 작품이 고장 나면 이놈들이 진가를 발휘합니다.” 이씨는 여전히 백남준의 그림자로 살고 있다. ‘보수’가 필요한 국내외 백남준 작품이 그를 기다린다.

 이씨는 경기도 양평, 궁벽한 농촌에서 부모 없이 자랐다. 어려서 라디오에, TV에 빠졌다. TV가 무척 귀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고교도 못 마치고 상경해 기술학원에 다녔다. 영등포에서 을지로까지 차비 2원50전이 없어 걸어 다녔다. “남들은 TV도 못 볼 때 전 그걸 들여다보고 고쳤어요. 남들이 못 하는 걸 한다는 희열, 그런 거죠.”

 그는 제대 후 세운상가에 전파상을 차렸다. ‘다다익선’에 TV를 협찬한 삼성 쪽 추천으로 백남준과 처음 만났다. 비디오 케이블도 없어 일일이 재단해 만들었다. 한 달 반의 분투 끝에 1003개의 모니터에서 현란한 영상이 흘러나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한창때는 백남준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백남준은 퍽 외로워했다. “밤 12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꼭 전화가 왔어요. 작품 구상 얘기부터 옛 동창들 안부 묻는 것까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어졌죠. 지금도 한밤중에 잠이 안 오면 어디선가 전화가 올 것만 같아요.”

 그가 작심한 듯 말을 이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 말로만 할 게 아니에요. 백 선생님 기리는 일, 작품 관리 모두 엉망입니다.”

 ◆백남준 작품 어떻게 하나=브라운관의 수명은 길어야 15년. 이러다 보니 전원이 꺼진 채 방치된 백남준 작품도 수두룩하다. 작품의 미래를 묻자 그가 얇은 LCD판을 하나 들어 보였다. “브라운관 TV 껍데기 속에 이걸 넣으면 외형은 감쪽같고, 화면은 더 잘 나와요. 최근 타이베이 예술대학 소장 ‘라이트 형제’도 이렇게 보수했어요. 제가 따로 주문해 둔 LCD판이죠.” 국내 소장가들은 작품이 달라질까 봐 꺼린다.

 그가 메모 한 장을 보여줬다. “90년에 가장 많이 쓴 일제 QUASAR TV가 노화됐으므로 이번 그것을 개량하기를 원합니다. 삼성, LG, 동양TV의 13INCH 알맹이를 이용하면 원작보다 훨씬 개량된다고 봅니다”고 2001년 7월 휘갈겨 쓴 메모다.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소장된 ‘나의 파우스트’(1989∼91) 개·보수 때 백남준이 이씨에게 건넨 메모였다. 문제는 브라운관 자체보다 관련 부품을 구할 수 없다는 거다. “백 선생님 작품, 제발 모셔만 두지 말고 트세요. 써서 노화돼 망가지는 것보다 안 써서 그 안에 습기 차고 먼지 쌓여 생기는 손상이 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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