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엿보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2)

중앙일보

입력

'붉은 악마' 탄생하다

앞서 말한 리버풀에는 'THE COP'이라는 서포터석이 있다. 'THE COP'의 유래는 1906년 리버풀이 두 번째 리그 우승을 하면서 관중석을 3만 석으로 확장했을 때 그 관중석의 이름을―잉글랜드의 관중석들은 하나하나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관중석 중에는 1966년 월드컵 우승 당시의 잉글랜드 팀 주장으로 웨스트 햄 소속이었던 보비 무어의 이름을 붙인 것이 있다―보어전쟁의 격전지였던 SPION COP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SPION COP에서 리버풀 출신의 병사들이 많이 전사했기 때문에 그들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새롭게 짓는 스탠드의 이름을 명명하자고 어네스트 에드워드라는 기자가 'Liverpool Post and Echo'라는 기사로 제안하였고 구단은 이것을 받아들였던 데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어네스트 에드워드도 나중에 COP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몰랐을 것이다. 1960년 중반 경기 내내 서서 응원하고 당시 인기 절정인 팝송을 약간 개사하여 부르는 응원 문화는 충격적이었고 열광적인지라 BBC에서 이들을 촬영해가기까지 했다. 이들의 응원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타 팀에선 '앵필드(리버풀 홈구장)에 가면 COP 때문에 한 골을 지고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할 정도.

이기고 있어도 경기 종료 휘슬을 기다리게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렬한 응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열렬한 양면성은 양날의 칼로 잉글랜드 축구에 작용하게 된다.

리버풀이 THE COP으로 상징된다면 맨체스터는 단연 '붉은 악마의 대부'인 '매트 버스비'로 대변된다. 맨체스터를 대표하는 선수인 보비 찰튼을 발굴해 낸 그는 1950년대 잉글랜드를 휩쓸면서 붉은 악마의 명성을 떨친 인물.

버스비가 뮌헨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만 당하지 않았어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은 8년이 빨랐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나오고 있다. 버스비는 축구 인재들을 발굴해 내고 키운 명 지도자로서 하등의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맨체스터의 홈 구장 올드 트래포드는 '티어트 오브 브랜드'라고도 불린다. 그렇지만 그곳의 정식 주소는 Busby Load이다. 매트 버스비의 이름을 경기장이 위치한 거리에 붙일 정도로 맨체스터에 있어 버스비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축구 종주국의 두 얼굴

잉글랜드의 축구 전용구장들은 널찍한 뜰들을 가지고 있다. 노팅검 포리스트의 홈구장 뒤쪽엔 강이 흐르고 있어 더위에 지친 관중들이 경기 끝난 뒤에 승리의 기쁨을 강에 뛰어들어 풀기도 하고, 넓은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기도 하면서 즐기는 공간이 있고 여기서 관중들은 경기 전, 후에 즐기는 시간을 가진다. 물론 대도시에는 점차 이런 휴식 공간이 사라져 가는 추세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축구 종주국를 대표하는 경기장은 앞서 펠레가 '축구의 성지'라고 꼽은 웸블리다. 웸블리는 사실 축구전용구장도 아니고 운동 경기장으로 설계되지도 않았다. 1923년 왕립 박람회가 열렸던 자리였고 이후 1948년 올림픽의 육상 경기장이 바로 웸블리였다.

그러나 이 웸블리에서 열리는 경기는 대표팀 경기와 FA컵 결승 단 두 경기. 따라서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들에게 있어선 웸블리란 '영광의 자리'요 '영광스러운 게임'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대표팀 경기는 가끔 가다 잉글랜드의 다른 경기장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FA컵의 결승전은 무조건 웸블리로 보아도 무방하다.

MU가 세계 최강 클럽컵의 참가를 놓고 끙끙 앓는 이유가 이러한 영광의 자리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웸블리에서 경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잉글랜드 축구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훈장인 까닭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축구를 얘기하자면 비극도 빼놓을 수 없다. 이름하여 뮌헨의 비극. 1958년 MU의 선수들이 유럽 클럽컵 예선전에서 유고의 베오그라드 레드스타와의 경기를 위해 유고로 갈 때의 일이었다.

뮌헨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Busby Babes'라고 불리던 당시 벤, 텔러, 에드워드 등의 훌륭한 선수들이 모두 죽고 가장 어렸던 보비 찰튼만이 살아남은 것. 이 보비 찰튼이 뒤에 잉그랜드가 월드컵을 우승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니 만큼 앞서 '이 사건이 없었다면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은 8년이 빨랐을 것'이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잉글랜드 프로축구에 있어 치명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헤이셀의 비극과 힐스버루 사건이었다….

악몽을 떨치고 화려하게 부활하라! 홀리건이 먹칠한 잉글랜드 축구의 새로운 탄생

축구의 나라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것은 비단 축구만이 아니다. 바로 그들의 훌륭하고도 자랑스러운 축구 역사에 먹칠을 하면서 탄생한 '훌리건'이 있기 때문이다. 등장과 함께 악몽과 비극을 뿌리고 다니는 영광스럽지 못한 이들이 잉글랜드 축구사에 미친 파장 또한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축구문화는 여전히 칭송받아 마땅하다. 영국인들에게 있어 축구는 생활이 자, 대대손손 물려나가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축구의 최대 비극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헤이셀, 힐스버루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헤이셀의 비극이란 1985년 5월 29일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리버풀VS유벤투스)이 벌어진 벨기에의 헤이셀 (Heysel)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이 경기는 유럽 챔피언스컵 결승답게 4억으로 추산되는 시청자가 위성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으며, 각국의 취재진들도 모여있는 빅 게임이었다.

그런데 경기 전부터 헤이셀 시내 곳곳에서 리버풀 팬들과 유벤투스 팬들 간의 주먹다짐이 있었고, 이것은 본 경기에 들어가기 직전, 경기장 내에서 잉글랜드의 과격한 축구팬인 '훌리건'들이 유벤투스 팬들뿐 아니라 일반 관중들에게 쇠파이프, 몽둥이, 칼 등을 휘둘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