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view &] 정권에 휘둘리지 않는 백년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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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이재술
딜로이트안진 대표이사

지난해 말 기획재정부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경쟁력 보고서를 발표했다. 경제를 중심으로 인프라와 사회통합,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경쟁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비해 어느 정도인지 비교적 소상히 들여다봤다. 해외 평가기관의 발표를 통해 우리 수준을 가늠해 왔던 그간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상당한 진전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이번 보고서는 우리 경쟁력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진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속성장을 통해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으나, 사회자본이 취약하고 산업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 등 지속성장의 걸림돌이 여전하다는 평가 역시 주목할 만하다. 토종 경쟁력 보고서는 차관급 협의체인 국가경쟁력협의회에서 향후 국가경쟁력 강화 정책을 가다듬는 근거자료로 활용될 것이라고 한다. 조만간 기획재정부 내에 국가 장기비전 수립을 전담하는 가칭 ‘장기전략국’이 신설될 예정이라고 하니 이래저래 중장기적 안목에서 국가 전략을 수립하는 작업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뒤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제라도 멀리 내다보고 거시적 차원의 비전이 담긴 전략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에 공감한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이 정부 출범 이후 국가경쟁력위원회, 미래위원회 등 여러 위원회가 너도나도 중장기 비전을 표방했지만 요란한 구호에 비해 성과는 고만고만하다. 상설 연구조직이 아닌 위원회는 인력과 조직의 한계가 분명해 어찌 보면 지금의 외화내빈은 예고된 결과였다.

 현실적인 대안은 오히려 가까운 데 있다. 넘쳐나는 국책연구기관을 한데 모으고 정리해 제대로 활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아래 포진해 있는 27개 연구기관을 한데 합쳐 국가적 어젠다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연구기관을 기능적 연관성에 따라 통합해 국가경영전략 수립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싱크탱크를 세울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특정 정파나 정치권력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다양한 분야를 융합·통섭하고 이를 통해 장기비전을 제시하는 ‘국가장기전략연구원’ 설립을 제안한다.

 사실 국가 장기전략 수립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일부 논란이 남아 있기는 하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위기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장기 비전을 설정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는 한 것이며, 가능하다 해도 실제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단편적이며 근시안적인 사고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한류(韓流)만 해도 그렇다. 1990년대 말 드라마에서 시작된 우리 대중문화 열풍은 중국과 일본, 대만을 거쳐 이제 동남아시아와 유럽 대륙까지 세를 확산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쉽지 않았고, 대견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대중문화에서 비롯된 한류 열기를 여타 분야까지 폭넓게 확산해 우리 제품과 서비스, 나아가 우리나라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 퍼지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다.

 한류가 더 이상 대중문화에 국한된 이슈가 돼서는 안 된다. 업계를 중심으로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콘텐트를 개발하는 데 힘써야 하겠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정부 역시 유망 콘텐트를 육성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 장기전략 차원에서 한류의 조직적 확산을 지원하는 부처 간 융합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이에 상응하는 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해체된 지 40년이 넘는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와 전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프리미어리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음반 판매와 입장료 및 TV 중계권료 수입, 각종 기념품 판매 등 직접적으로 거둬들이는 수익도 천문학적이지만 이들을 통해 영국이 얻는 유무형 이익은 그 이상이다.

 한류가 지향해야 할 바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인기를 모으고 있는 대중가요와 드라마, 영화에 다양한 우리 문화와 역사를 접목해 자연스럽게 외국인의 의식 속에 우리 것이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파급효과는 문화는 물론 정치와 경제, 외교 등 각 분야에 고루 전파돼야 한다.

 더 이상 눈앞에 닥친 숙제 해결에 매달려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방향타를 잃은 채 대양을 무사히 건널 수 없는 것처럼 장기 비전과 전략이 없는 상태에서 지속가능한 성장발전을 기대하기란 무리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흔들림 없이 모두의 지혜를 모아 국가 백년대계를 수립할 때다.

이재술 딜로이트안진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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