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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재 영화 '하루'서 또다른 모습

중앙일보

입력

이성재를 만난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굵은 빗발을 헤치고 그가 신문사 건물로 들어섰다. 하늘은 어두웠다. 올이 풀린 낡은 청바지 같은 구름이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베이지색 라운드 니트에 흰색 면바지.신발은 흰색 스니커즈다. 편하면서도 센스있는 옷차림이다. 스크린에서보다 훨씬 커보이는 키(1백80㎝)가 꾸밈없지만 세련된 차림새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목덜미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머리도 인상적이다.

#1 그런 모습이 특유의 조용한 목소리와 어울려 그를 한층 여유있고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운동복 차림으로 투덜대면서 아내에게 줄 호두를 까던〈플란다스의 개〉의 하릴없는 백수 윤주는 어디로 갔을까.

"아,머리요? 좀 길렀어요. 새 영화에도 그대로 출연합니다.어렵게 이루는 사랑,그 사랑 끝에 찾아오는 슬픈 이별…. 그런 영화죠."

새 영화란 고소영과 공연하는〈하루〉(쿠앤필름·한지승 감독)를 말한다.다섯째 출연작이다.영화마다 전혀 다른 캐릭터를 선보였던 그는 신작〈하루〉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쿠앤필름은 시나리오가 나오자마자 감독도 결정하기 전에 남자 주인공으로 그를 점찍었다.

"요전에 어떤 역을 했으니 이번엔 전혀 다른 역할을 해보자,뭐 이런 식으로 출연작을 결정한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사실 배우로서 '변신'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시나리오를 꼼꼼히 읽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참가할 뿐"이라는 그에게 영화〈자귀모〉이야기를 꺼냈더니 금방 실토한다.

"요즘 유난히〈자귀모〉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사실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출연을 결정한 유일한 영화였죠. 결국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 됐어요."

그리 좋지 않은 평을 받았던〈자귀모〉이야기를 하는 표정이 상당히 괴로워 보인다.솔직하다.감정을 과장하지도 않지만 억지로 감추지도 않는다.

영화 속 그의 분신들도 모두 그랬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보니 여자 친구가 사라진 철수(〈미술관 옆 동물원〉)를 시작으로, 이승을 떠도는 불쌍한 영혼을 도와 주는 칸토크라테스(〈자귀모〉), 잃어버린 꿈 위에서 부유하는 '짱' 노마크(〈주유소 습격 사건〉), 일상에 지친 소시민의 상징 윤주까지.

"제 성격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낙천적이면서도 내성적이고,끈질기면서 무심하고.대범하면서도 소심해요. 내면의 그런 다양함 가운데 한 부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싶습니다. 영화를 통해서요.요즘은 사랑 가득한 따뜻함이 간절합니다.〈하루〉를 통해 해결해야죠."

#2 이성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경복궁 옆 국제갤러리로 자리를 옮겼다.미술관과 레스토랑을 겸한 곳이다.차가운 은색의 새 차가 주인과 잘 어울렸다. 사람이든 차든,주위를 부드럽게 빨아들이는,아니 그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능력이 배우로서 이성재의 최고 강점이 아닐까.

〈플란다스의 개〉 개봉 이후 몇 달 만에 처음 하는 인터뷰라고 했다. 소속사도,매니저도 없는 그는 영화 개봉 때 외에는 특별히 언론에 나설 일이 없다.

성실함에 대해 이야기했다.〈미술관 옆 동물원 〉촬영 때다.PC를 이용해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장면이 있었다.문외한일 뿐더러 아예 집에 컴퓨터도 없던 그는 "잔머리를 써서" 키보드만 하나 샀다.그럴 듯 해 보이도록 대충 자판 두드리는 연습을 했다.소리와 상관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연기처럼.제대로 된 글이 입력되든 말든.

"시사회장에 한 PC통신 동호회 회원 30여 명이 단체로 참석했어요. 키보드 치는 장면이 나오자마자 일제히 웃더군요.엉터리란 걸 한눈에 알아차린 거죠. 도망치듯 빠져나왔습니다.아아,뭘 하든 진짜로 해야겠구나 하고 뼈저리게 반성했죠."

#3 이성재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꼭 쥐었다. 가끔 하얀 잔에 묻은 커피 흔적을 손으로 몇 번이고 닦아냈다.손톱은 짧게 잘랐다.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는 하나도 없다.

부근의 '삼청동 수제비 집'으로 옮겨 감자전과 수제비를 먹었다. 큰 항아리에 담겨 나오는 수제비를 적당히 그릇에 덜어 먹는다. 열무 김치와 함께 맛있게 수제비를 세 공기쯤 비우며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했다.

한 인터넷 사이트의 TV광고에서 보여줬던 라틴 댄스 실력에 대해 묻자 "라틴 댄스요? 전혀 못 춰요.찍느라고 정말 혼났어요"라며 손을 내저었다. 좀 춥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배우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영화 촬영을 시작하고 첫 두 주일이 제일 힘듭니다. 매번 그래요.새로운 인물에 적응하는 몸살이겠죠."

한국 영화계는 여배우에 비해 쓸 만한 20∼30대 남자 배우의 층이 두텁지 못한 지 오래됐다. 고정된 이미지를 깰 수 있는 배우는 더욱 드물다. 그런 점에서 이성재의 몸살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 이성재는

70 년생. 고등학교 3학년 때 난데없이 "신학교에 가겠다" 고 선언, 부모를 놀라게 했다가 방향을 바꿔 재수 끝에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정훈병으로 군에 자원 입대했으나 결국 아무 상관없는 국방부에 배치돼 서류 정리만 실컷 하다 제대했다.

두 번 낙방 끝에 MBC 탤런트 공채(24기)에 합격했다.〈올가미〉 의 박용우,〈아나키스트〉의 정준호가 동기다. 공채 합격 후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2년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단역 생활을 했다.

"주인공에게 딱 한 번 질문을 던지는 기자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촬영을 기다리며 나름대로 연구를 했어요. 취재수첩에 적어 놓은 질문을 보며 대사를 하기로 결심했죠. 촬영이 시작되고 대사를 하자마자 PD가 '야, 그걸 못 외워서 보고 읽니' 라며 다짜고짜 엄청나게 욕을 퍼붓더군요. 지금도 못 잊어요. "

드라마〈거짓말〉에서 우수에 찬 미술가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뒤 영화계에 입문했다.

제작은〈자귀모〉가 먼저 들어갔으나 〈미술관 옆 동물원〉이 먼저 개봉, 결국 데뷔작은〈미술관 옆 동물원〉 이 됐다.

"참 다행" 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98년 대종상.백상예술대상.영화평론가상.춘사영화상의 신인남우상을 휩쓸며 단숨에 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이후 지난해 최고 흥행작〈주유소 습격사건〉으로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올해〈플란다스의 개〉 로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받는 등 평론가와 관객 양쪽으로부터 모두 호평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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