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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서른세 살 차이 김정문 회장과 결혼, 8년만에 사별 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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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문알로에 최연매(52) 대표가 알로에 화분 사이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알로에 먹고 바르면서 피부가 정말 좋아졌다”는 최 대표. 회사 홍보가 톡톡히 될 만큼 확실히 젊어 보였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른셋 나이 차를 무릅쓰고 한 결혼인데….

결혼 8년 만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남편이 일군 회사는 부도 위기에 빠졌다. 그 회사를 맡아 경영한 지 꼬박 6년. 연매출이 두 배 가까이 오르며, 회사는 재기에 성공했다. 김정문알로에 최연매 대표의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삶의 고비고비마다 “해 보자”며 승부수를 던진 이야기다.

‘김정문알로에’는 잘 알려진 기업이다. 연매출 1100억원대, 직원 수 130여 명. 회사 외형에 비해 인지도는 더 높다.

창업주 김정문(1927∼2005) 회장이 생전 TV에 1000번 넘게 출연했다니, 그 덕도 클 듯하다. 반면에 최고경영자(CEO) 최연매(52) 대표이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중학교 국어교사 출신인 그가 서른셋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김정문 회장과 결혼한 이야기부터 인터뷰는 시작됐다. 그는 인생의 고비에서 늘 “그래, 해보자”고 승부수를 던지며 살았다. 결혼도, 회사 경영도, 자녀 교육도 모두 그랬다.

청주 지사장 하다 김정문 회장 처음 만나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 김정문 회장의 아내와 두 살배기 아들도 건물 잔해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당시 언론에도 꽤 크게 보도됐다. 그때 최연매 대표는 김정문알로에 청주지사장이었다. 김 회장과 최 대표는 그 다음해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이 직원 교육을 위해 청주에 내려왔던 날이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 김 회장이 갑자기 김소월의 시 ‘초혼’을 낭송했다.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이 아프게 전해졌어요. 아, 저 사람에게 마음의 동무가 돼주고 싶다, 그랬지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회장이 청주MBC 강연차 또 청주에 왔다. 청주지사장인 최 대표가 김 회장을 수행했고, 둘은 일대일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97년 4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김 회장은 일흔, 최 대표는 서른 일곱이었다.

 청주사범대(현 서원대)를 졸업한 뒤 중학교 교사 생활을 했던 최 대표가 김정문알로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91년이다. 결혼과 이혼을 거친 뒤 혼자 남매를 키우며 새 일을 구하고 있었던 때였다.

 “김정문알로에 대리점에 들어갔는데, ‘진실’이란 사훈을 적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여기선 최소한 사기는 안 당하겠구나 생각했죠.”

 대리점을 인수해 사업을 시작했다. 김정문알로에는 방문판매로 매출을 올리는 회사다. 판매사원을 교육시키고 관리하는 업무가 최 대표의 일이었다.

 “현장에 나가서 잘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일이었어요. 사람을 성장시키는 일이란 점에서 교사와 비슷한 역할이었죠.”

 사업은 잘 됐다. 대리점 내고 3년 만에 청주 매출의 대부분이 최 대표 대리점에서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였다. 그 성과 덕에 93년 청주지사장으로 발탁됐다. 최 대표는 그 시절을 “돈 구애 안 받고 살았던 때”라고 돌아봤다. “외투에 100만원이 들어 있는 걸 모를 정도였다”고 말했다.

 최 대표의 재혼은 아무에게도 축하받지 못했다. 주변에선 최 대표를 두고 “돈 보고 결혼한다”며 수군댔다. 하지만 최 대표는 “나만 아니면 된다”며 마음을 굳혔다. 최 대표의 부모님은 물론 입법·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던 두 남동생 등 가족 누구도 최 대표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장님의 인격에 대한 존경심·경외감이 결혼까지 하게 했죠. 회장님은 사업가가 아니라 사회운동가셨어요. 누구든 인간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신념이 굉장히 강했죠.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입고 있던 양복까지 벗어주고, 제3세계 굶어 죽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식사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분이셨어요. 사업하며 번 돈을 거의 다 남 돕는 데 써버리고 본인은 월세집에 살고 계셨지요.”

최연매 대표가 서울 서초동 회사 사무실에 서 있다. 지난해 새로 구입한 지상 6층, 지하 1층 건물의 6층이 그의 업무 공간이다.

8년 만에 남편과 사별 … 회사 부도 위기에

최 대표는 김 회장을 가리켜 “살면서 보니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너무나 섬세하고 진실했어요. 아주 깊고 순수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요. 사치는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었는데도, 여행을 다닐 때마다 그 도시에서 유명한 보석을 선물로 사주셨어요. 나이가 많아 함께 있는 시간이 어차피 길지 못할 테니 추억으로 생각하라면서요.”

 김 회장은 2005년 12월 12일 심장 대동맥 파열로 작고했다. 결혼한 지 겨우 8년이 지났을 때였다. 최 대표는 그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요. 11일부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기어이 안 들어가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병원 앞으로 목사님까지 오셔서 설득했는데도, 막무가내셨어요. 그러면서 ‘만만만 생명운동(만 명의 후원자가 월 만원으로 만 명의 생명을 살리자는 운동. 제3세계 최빈국 아이들을 돕기 위해 2003년부터 시작했다)을 계속해 달라. 젊은 아내 두고 가서 미안하다. 더 오래 살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된다’고 하셨죠. 지금 생각하면 유언이었던 셈인데…. 결국 병원 앞에서 돌아나오며 아무래도 이상해서 큰아드님(김 회장의 첫 부인이 낳은 큰아들을 말한다)을 집으로 오라고 했지요. ‘아들이 병원에 가자고 하면 혹시 갈지 모르겠다’는 기대도 있었어요. 대화는 순조로웠죠. 병원 가시자는 아들 말에 ‘그래, 알았다’ 대답하셨으니까요. 아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회장님이 ‘오랜만에 참 평화롭다’고 하셨죠. 그리고 물 한잔 달라셔서 드렸더니, 갑자기 ‘불 켜’ 하시더라고요. 그때 동맥이 파열되면서 시신경도 손상됐던 모양이에요. 세상이 갑자기 깜깜해지니까, 불을 끈 줄 아신 거죠. 그리고 얼굴이 하얘지면서… 119를 불렀지만 이미….”

 창업주의 죽음은 회사 ‘김정문알로에’의 생존도 위태롭게 했다. 회사는 부도 위기에까지 몰렸다. 당시 최 대표의 회사 내 직함은 부회장이었다. 2000년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면서 시장점유율과 매출이 더 떨어지자 2003년부터 김 회장과 최 대표가 직접 경영 일선에 나선 상태였다.

 “위기였지만 포기할 순 없었어요. 기업을 포기하면 회장님은 두 번 죽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죠. 직원들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회사를 위해 임원들 네 분이 자기 집을 담보로 보증을 서주시기도 했고요.”

최연매 대표와 김정문 회장의 신혼 시절. 1 제주 김정문알로에 농장에서 찍은 사진. 제주 농장은 최 대표가 지금도 힘들고 지칠 때 마음을 달래려 들르는 ‘힐링캠프’다. 2 김 회장의 생일날 경기도 용인 집에서. 3 김 회장의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가족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1997년 두 사람이 재혼했을 때 최 대표의 두 자녀는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남편 꿈꿨던 사회공헌, 계속 이어나갈 것

회사는 살아났다. “엄마처럼, 누나처럼, 직원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겠다”는 최 대표의 경영 원칙이 효과가 있었던 셈이다. 95년 690억원이었던 연매출이 2011년 1170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엔 서울 서초동 기존 사옥 바로 옆 건물도 추가로 매입했다. 또 취임 당시 2000여 명이었던 방문판매사원(카운슬러)은 현재 5000명을 넘어섰다.

 “방문판매의 성패는 얼마나 고객들의 신뢰를 얻는가에서 갈려요. 직원들부터 서로 믿고 화합해야 고객들에게 제품의 진실성이 전달되죠. 그런데 회사를 맡고 보니 본사는 대리점 욕하고, 대리점은 본사 욕하고, 직원은 임원 욕하고, 임원은 직원 욕하고… 최악의 상황이더라고요.”

 최 대표는 그런 사내문화부터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남 탓하고 험담하는 직원에게는 무조건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 그리고 ‘독서 경영’을 도입했다. 매달 두 권씩 필독서를 정하고 전 직원들에게 독후감까지 쓰게 했다.

 “단순히 책에서 교훈을 찾자는 게 아니었어요. 책을 함께 읽는다는 것 자체가 ‘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요. 같은 책을 읽으면 단어를 공유할 수 있게 되고,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게 되죠.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지게 되고, 서로 정도 쌓이는 거지요.”

 최 대표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원래 이름은 ‘열매’였다고 한다(하지만 꼭 한자 이름이어야 한다는 면 서기의 고집 때문에 ‘연매(蓮梅)’가 되었단다). 그 ‘열매’를 알로에 사업에서 거둬들이겠다는 게 최 대표의 꿈이다. “국내에 처음으로 알로에를 보급한 기업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자연건강문화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란 포부다.

 “현재의 건강기능식품과 화장품 사업 분야를 더욱 확충해야죠. 또 대국민 건강프로젝트 ‘자연식 캠페인’을 진행할 계획이에요. 제주에 있는‘알로에 식물원’을 휴양지 ‘알로에 테마 랜드’로 확대 운영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고요….”

 창업주가 가장 신경 썼던 사회공헌 활동도 최 대표가 열매를 거두겠다고 마음먹은 분야다. 김 회장이 유언으로 남겼던 ‘만만만 생명운동’뿐 아니라 지병이 있는 저소득 가정에 알로에 제품을 무상 지원하는 ‘산수유 제도’, 사내 봉사동호회를 만들어 영·유아 복지시설을 돕는 ‘초록회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회장님과는 좀 달라요. 회장님은 회사가 망해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분이셨지만, 망하면 더 도울 수 없잖아요. 저는 망하지 않을 만큼만 도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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