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끈한 소호, 호방한 해강 … 사군자에 인생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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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해강 김규진의 열 폭 병풍 ‘월하죽림도(月下竹林圖)’. 보름달 아래 대숲에서 죽순이 힘차게 올라온다. 다산을 뜻하는 상서로운 기운이다. ‘죽보평안(竹報平安)’. 대나무엔 평안을 가져다 준다는 뜻도 담겼다. 올 한 해 대바람처럼 평안하시라.

“요즘 사람 옛적 달 못 보았으나, 요즘 달 옛 사람을 비추었으리. 옛 사람 요즘 사람 모두 흐르는 물 같으나, 달 보는 그 마음은 모두 같으리…….”

 이태백(701∼762)의 칠언시 ‘대주문월(對酒問月)’의 앞머리다. 묵란도(墨蘭圖)에 능했던 근대 서화가 소호(小湖) 김응원(1855∼1921)이 활달하게 행서로 옮겨 적었다. 2012년 신년 벽두에 옛 서화를 찾는 이유를 묻는다면, 전시장에 걸린 이백의 시에 그 답이 있다.

소호 김응원의 ‘석란도(石蘭圖)’.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본관에서 11일부터 ‘소호(小湖)와 해강(海岡)의 난죽(蘭竹)’전을 연다. 외면 받는 고미술, 그 중에도 천덕꾸러기인 근대기 서화를 재조명하는 전시다.

 난(蘭)은 깊은 숲 속에 피어 알아주는 이 없어도 향기를 뿜는다. 곤궁해도 굴하지 않고 도 닦고 덕 세우는 군자의 모습과 닮았다고 예부터 사랑 받았다.

죽(竹) 또한 사철 푸름을 유지해 군자의 절개에 비유된다. 사군자, 그 중에서도 난죽은 일제강점기에 특히 유행했다. 군자가 그리운 시대였기 때문일 게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난죽은 세한의 계절에 더욱 가치를 발하는 우리 옛 그림의 표상이다.

 난은 조선 초엔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들이 간혹 그렸고, 18세기 이후 널리 유행했다. 19세기엔 추사(秋史) 김정희, 석파(石坡) 이하응(흥선대원군)이 묵란으로 이름을 날렸다. 예서·행서를 잘 썼던 소호에 대해선 대원군에게 쏟아지는 청탁을 대신해 난을 그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당대의 풍운아 석파는 “십 년을 나갔다 물러났다 하기를 험한 산길처럼 살아왔다(進退十年羊九腸)”라고 시를 지었다. 굴곡진 인생만큼이나 굵기와 농담의 변화가 역동적인 난을 즐겨 그렸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는 “대원군의 난엔 인생의 응어리가 담겨 있다. 이점이 석파란을 조선왕조 통틀어 최고의 난으로 꼽게끔 한다. 예술엔 인생이 녹아있는 것이다. 반면 서예의 기본기도 탄탄했던 소호의 난은 곱고 매끄럽다. 친일적 요소도 있다. 석파 같은 고난의 삶을 살지 않은 것, 그게 소호의 미덕이자 한계”라고 설명했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은 굵은 왕죽을 당대에 유행시켰을 만큼 통죽에 빼어났다. 영친왕에게 서법을 가르쳤고, 창덕궁 희정당에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서화뿐 아니라 신문물에도 밝아 조선인으론 처음으로 사진관(천연당 사진관)을 열었고, 어전(御前) 사진사가 됐다.

  한쪽으로 날리는 짧은 댓잎으로 세찬 바람의 기운을 드러내는 기법은 후대 화가들에게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젊은 시절 죽사(竹士)라는 호를 사용할 만큼 묵죽도를 잘 그렸던 이응노(1904∼89)에게 계승됐다.

 전시작 34점 모두 이 화랑이 과거 일본 소장가에게 일괄 구매한 것이다. 섬세하게 표구된 묵죽도 족자와 병풍, 혹은 투명 아크릴 박스 안에서 한층 모던한 묵란도가 한옥 서까래 밑에서 고고하다.

  우 대표는 “현대라는 게 어느 한 순간 뚝 떨어지진 않았다. 우리도 중국 현대미술처럼 전통에서 뿌리를 찾는 작업을 해야 한다. 해강과 비슷한 시기 활동한 중국 서화가가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다. 베이징서 718억원에 팔린 그의 서화가 지난해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기록됐다. 해강의 작품은 비싸야 2억원이다. 어떻게 조명하느냐에 따라 이렇게 대우가 다르다”고 말했다. 전시는 2월 19일까지. 무료. 02-720-1524.

◆사군자(四君子)=매란국죽(梅蘭菊竹)으로 선비정신의 상징이다. 19세기 문인화 부흥에 힘입어 화단의 주류로 떠올랐다. 여백과 흑백의 묘미를 살려 동양 회화의 가치와 정수를 담아낸 분야다. 사군자 전문화가는 일제강점기에 대거 등장했고, 작품 수도 크게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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