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챙기면 손해" 공짜 열풍

중앙일보

입력

대학생 한성준(23)씨. 일명 '만화방'으로 불리는 만화 대여점의 단골 고객이었던 그는 얼마전부터 대여점을 찾는 횟수가 크게 줄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공짜가 널려 있어요. 〈미스터 초밥왕〉〈뒤집어지는 삼국지〉 등 인기 만화들을 모두 무료로 봤지요." "아직 못 본 공짜 만화가 인터넷에 워낙 많아 상당 기간 대여점을 찾지 않아도 만화를 실컷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한씨의 말이다.

무료 만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사이트는 최근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대폭 강화한 포털 사이트 라이코스 코리아. 콘텐츠 전문 업체들과 제휴, 인기 만화 수백 편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이 사이트의 만화 섹션 하루 페이지 뷰는 1천만 건을 웃돈다.

한씨가 요즘 가장 즐기는 게임은 익살스럽게 생긴 탱크를 조작,대포를 쏴 목표물을 공격하는 온라인 게임 포트리스2. 이것 역시 공짜다. 회원 가입만 하면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이 게임은 회원이 3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만화나 게임뿐 만이 아닙니다. 영화관·PC방·카페 등 공짜로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요." 한씨처럼 젊은이들 중에는 전략형 '공짜족'이 많다.

영화홍보대행사 관계자들은 요즘 급격히 늘어난 극성 '공짜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 관계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시사회장에 가장 먼저 몰려와 자리를 선점하는 공짜족 때문에 정작 담당 기자 등 초청 인사들이 자리가 없어 곤란을 겪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며 "인터넷에 악평을 올리는 등 '복수'가 걱정돼 홀대 할 수도 없어 난처하다"고 밝혔다.

또 다른 회사의 홍보담당자는 "개봉 당일 선착순으로 나눠주는 고가의 경품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극장 앞에 진을 치며 '작전'을 펴는 이들도 많다. 경품을 받으면 정작 영화는 관람하지도 않고 가버리는 이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공짜 열풍이 일고 있다. 눈치를 보거나 쭈뼛거리지 않고 공짜를 당당히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아예 '나는 공짜가 좋아요'라는 카피를 내세운 광고가 인기를 끌고 있다.

젊은이들의 공짜 열풍에 가장 먼저 불을 지핀 것은 이동전화 서비스 회사들이다. SK텔레콤·LG텔레콤·한국통신프리텔 등은 전국에 최대 1천여 개의 음식·게임·영화·스포츠·패션·음악·댄스·여행·레저업체들과 제휴해 경쟁적으로 공짜 혹은 요금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공짜 열풍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지난달 잠실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올스타전에서 '출전 선수와 이름이 같은 관객은 신분증 대조 후 공짜 입장'이라는 행사를 벌였다. 그날 공짜로 경기를 관람한 관객은 모두 56명. "다른 입장객들도 재미있어 하는 등 관객 몰이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연맹 관계자는 밝혔다.

지난달 1일 개통한 서울지하철 7호선까지 '3일 동안 무료 탑승'이라는 공짜 마케팅을 펼쳤다. 저녁 6시 개통한 첫 날 16만 장의 공짜표가 나갔으며, 3일 동안 모두 1백7만명의 시민들이 지하철 공짜 탑승을 즐겼다.

제과회사 동양제과는 새로 출시한 과자를 홍보하기 위해 이 과자 50만 봉지를 공짜로 풀고 있다. 지난달 말부터 서울의 신촌·대학로 등 젊은이들이 붐비는 거리와 주요 대형 극장에 과자를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누구나 공짜로 가져가도록 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순식간에 없어진다. 비용에 비해 짭짤한 홍보 효과를 거뒀다"고 즐거워했다.

공짜 문화 열풍 때문에 희비가 엇갈리는 사례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음악 압축 파일인 MP3. 미국의 냅스터와 유사한 MP3 공유 사이트인 국내의 '소리바다'는 지난 5월 문을 연 이후 매달 수십만 명씩 회원이 늘고 있다.

이처럼 공짜 MP3 덕분에 돈 한푼 안내고 CD 음질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음악을 사실상 무한대로 즐기게 된 젊은이들과 MP3 플레이어 제작업체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는 반면 국내 음반 업계의 불만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통계로 봐도 국내의 MP3 플레이어 시장은 지난해 8만 대에서 올해 30만 대, 내년에는 80만대로 급성장이 예상되고 있지만, 음반 시장은 1998년 4천억원에서 지난해 3천억원, 올 상반기 1천7백억원으로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MF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음반 시장 불황에는 젊은층의 공짜 MP3 열풍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는 게 음반 업계 관계자들의 불만 섞인 분석이다.

이처럼 갈수록 거세지는 공짜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

광고대행사 LG애드 마케팅팀의 한천규(36) 차장은 "공짜 마케팅 비용은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는 것"이라며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소비자로서는 고객 친밀도를 높이려고 기업체들이 펼치는 공짜 마케팅 전략을 역으로 적극 이용하는 것도 현명한 소비 전략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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