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세계 바둑계에 바란다 ① 후지쓰배마저 중단한 일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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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장쉬 9단과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은 현재 일본의 3개 기전을 나눠 갖고 있지만 이들의 세계랭킹은 30위권을 벗어난다. 일본이 ‘오픈’이라는 세계바둑의 추세를 외면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이유다. 사진은 장쉬(왼쪽)가 2010년 기성전에서 야마시타 게이고를 꺾고 기성에 오른 뒤 복기하는 모습. [일본기원 제공]

올해도 세계의 프로기사 중 가장 돈을 많이 번 기사는 일본 기사다. 일본기원의 공식 발표는 없지만 명인과 본인방을 차지한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이 두 기전 우승상금만 6900만 엔(10억3200만원)에 모든 대국에 따로 대국료가 지급되는 일본 시스템을 감안할 때 총 15억원은 벌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기성전(우승상금 4500만 엔)과 왕좌전(우승상금 1400만 엔) 우승자 장쉬 9단도 두 기전 우승상금으로만 8억8000만원을 벌었다. 일본 바둑은 쇠락했으나 일본 3대 기전(기성전·명인전·본인방전)은 세계대회 몇 배 규모다. 배태일(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의 세계랭킹에서 30위 이내에 든 일본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지만 일본 기사는 여전히 상금에서만은 세계 최상위에 있다.

 프로세계에서 이처럼 실력과 상금의 극단적인 괴리가 발생하는 일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일본은 도쿠가와(德川) 막부 이래 깊이 있는 바둑 문화를 일궈왔고 프로 제도와 프로 기전도 만들어냈다. 서구의 바둑 보급도 도맡았다. NHK는 지금도 3대 기전 을 중계한다. 때론 한 시간 동안 한 수도 안 놓이는 바둑판을 내보내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일본은 부자 나라다. 이런 것들이 일본 바둑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다.

 하나 이런 모순은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까. 이미 일본에선 32년 전통의 세계아마대회가 스폰서 부족으로 힘들게 연명하고 있고, 24년 이어온 후지쓰배 세계대회는 끝내 중단을 선언했다. 도쿄의 후지쓰배에서 일본 기사가 우승한 것은 1997년이 마지막이니까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도요타덴소배, CSK배에 이어 후지쓰배마저 중단하면서 일본 바둑은 세계와 단절하고 아예 깊은 굴 속으로 숨어버리는 느낌이다.

 일본 바둑이 모순과 퇴행을 차단하고 다시 살아나는 길은 단 하나다. 일본 3대 기전의 문을 활짝 열어 한국과 중국의 강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의 프로들은 “무슨 소리냐. 그들이 상금을 싹쓸이해 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일본 바둑은 고사하고 말 것”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처음 몇 년간은 3대 기전 상금을 한국이나 중국 기사가 쓸어갈 것이고, 그 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고통 속에서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그 변화는 ‘일본의 반격’과 ‘일본 바둑의 부흥’이라는 필연적인 스토리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그 재미있는 드라마가 진정 보고 싶다. 일본 바둑이 노쇠하고 겁 먹은 목소리 대신 용기와 자존심을 회복하고 세계 속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중국은 이미 한·일보다 훨씬 자본주의적인 중국리그를 13년 전 시작했다. 올해는 최대 규모의 세계대회도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 삼성화재배 등 3개 세계기전의 문호를 모조리 열어 외국 기사와 아마추어까지 받아들였다. 국내 기사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한국은 그 같은 개혁의 힘으로 패망의 코스를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일본은 현존하는 프로기사의 기득권에 더 이상 연연해선 안 된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일본 바둑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일본 3대 기전이 문을 활짝 연다면 한·중·일 3국의 ‘동북아 리그’가 청사진을 펼칠 것이며 이런 발전은 곧 바둑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일본 바둑은 꼭 일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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