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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뒤죽박죽 법안 통과 … 곳간지기 박재완은 ‘창조적 해법’ 이라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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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지난해 12월 3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부 측 관계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박 장관은 상임위를 통과한 다른 부처 소관 법률 5건에 이의를 제기해 이를 보류하거나 수정하도록 했다. [뉴시스]

“창조적인 해법일 수 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2일 시무식 직후 기자실에 들러 뜻밖의 말을 했다. 지난 연말 국회 막판에 소득세 최고세율 구간이 신설된 것에 대해 “본회의에서 충분한 논의 없이 처리돼 안타깝다”고 지적한 뒤 나중에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는 언급을 했다.

최고세율 문제는 상임위인 국회 기획재정위에서 오랜 토론 끝에 현행 세율을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린 문제였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30일 재정위 위원을 포함해 여야 의원 52명이 서명해 새 법률안을 본회의에 다시 상정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박 장관 자신도 12월 3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이를 가리켜 “미스터리”라고 표현했다. 정부로선 불의의 일격을 당한 셈이다. 그런데 ‘피해당사자’인 박 장관은 왜 상임위 합의를 무시한 일부 의원의 반란에 ‘창조적인 해법’이란 표현까지 썼을까. 지난 연말 박 장관의 국회 행적을 짚어보면 궁금증이 자연스레 풀린다. 18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지역구 챙기는 법률을 마구잡이로 통과시키려는 의원들, 여기에 슬쩍 무임승차하는 부처 이기주의…. “레임덕은 없다”는 대통령의 말이 무색해지는 광경이다.

 12월 2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거창사건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상임위를 통과했다. 거창사건의 희생자와 유족 등에게 보상금,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을 새로 지급하는 내용이었다. 예산안 통과를 위해 국회에 나가 있던 재정부 예산실 직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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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법안이 통과될 경우 노무현 정부 때처럼 이명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거창사건을 보상할 경우 6·25전쟁이나 제주도 4·3사건 등 유사사건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다 수용할 경우 재정부담이 너무 과도하다”고 설명했다. 재정당국은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25만 명에게 모두 보상할 경우 무려 25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분석했다. 결국 박재완 장관은 법사위원장과 간사에게 전화를 걸어 법안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결국 법사위는 해당 법률의 본회의 상정을 보류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통과시켰다.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민주통합당 장병완(광주 남구) 의원이 주도한 법안이었다. 문화산업 발전을 위한 기술 연구와 개발업무를 하는 ‘한국문화기술연구원’을 광주에 설립하는 내용이다. 정부 관계자는 “관련 부처인 문화부가 산하기관을 하나 더 늘리기 위해 의원입법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의원을 도와주거나 최소한 상임위에서 관련 법안의 진행과정을 체크해야 하는 담당부처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혐의가 짙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에서 정부 부처는 한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정권 말이라고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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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정부는 12월 28~29일 열린 법사위에서 공공기관 선진화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이 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미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따로 연구기관을 세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출연연구기관은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의해서만 설립할 수 있는데 별도 법에 의해 기관을 설립하면 정부출연연구기관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박 장관은 ‘당사자’와의 합의를 요구하는 법사위 요청에 따라 광주시장 등과 전화로 설득작업을 해야 했다. “기존 연구기관인 광주과학기술원을 활용하면 지역 입장에서도 더 유리하도록 배려하겠습니다.” 재정당국과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잘 됐는지 법사위는 별도 기관을 설립하지 않고 광주과학기술원을 문화기술연구 주관기관으로 지정하는 수정안을 30일 통과시켰다.

 교육과학기술위원회도 연말에 한 건 했다.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이 28일 상임위를 통과했다. 이 법은 한나라당 황우여(인천 연수구) 원내대표가 주도했다. 정부와 인천시는 2006년 4월 양해각서를 맺었다. 시립대인 인천대를 국립대학법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지자체가 어떤 부담을 질 것인지를 정했다. 인천시는 법인화 후 5년간 매년 300억원을 지원하고 6년차부터 10년간 매년 200억원씩 2000억원을 조성하며, 정부는 법인화 후 6년차부터 대학운영비를 지원하는 게 골자였다. 그러나 ‘황우여법’은 이런 내용의 양해각서를 반영하지 않고 출연금의 국고 지원을 의무로 규정해 버렸다. 재정부 관계자는 “여당 지도부까지 재정부담을 수반하는 법률을 은근슬쩍 통과시키려고 하면 정부 곳간은 누가 지키느냐”고 한탄했다.

 박 장관은 2006년의 양해각서 반영과 출연금 조문을 임의규정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토론 끝에 법사위는 30일 이 법률안을 수정 의결했다. 양해각서 이행은 법사위 부대의견으로 달고, 출연금 규정에 ‘예산의 범위에서’라는 문구를 넣었다.

 27일 농림수산식품위원회를 통과한 ‘농업소득의 보전에 관한 법률’도 문제였다.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성난 농심(農心)을 어느 정도 달랠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과수·화훼·채소와 같은 고소득 작물까지 직불금을 지급하는 건 지나쳤다. 결국 법사위에서 박 장관의 지적을 받아들여 밀·콩·보리 등 자급률을 높일 필요가 있는 핵심 식량작물 19개 품목에 한해 직불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26일 지식경제위원회를 통과한 ‘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법’도 정부 지원 규모를 특정 지표와 연계해 재정운용의 경직성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재정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일부 수정되는 선에서 법은 통과됐다.

 박 장관은 국회 상임위에서 만든 법안 5개를 법사위에서 보류시키거나 보완했다. 그나마 선방한 것이지만 제대로 된 정부라면 상임위 단계에서 그런 법안을 막았어야 했다. 새해 과천청사로 돌아온 그는 2일 시무식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여러분이 기획재정위와 예결위뿐 아니라 법사위 등 모든 상임위의 파수꾼이 돼 달라. 불가피하다면 나도 각 상임위와 법사위의 불청객 노릇을 마다하지 않겠다.” 그는 “교과위·농식품위·문방위·지경위 등에서 통과된 법률안에 이견을 제기하기 위해 여러 차례 법사위에 출석했다”며 “그 결과 해당 법안을 수정하거나 보류했지만 일단 상임위를 통과한 뒤라서 바로잡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박 장관의 ‘창의적 해법’은 이해집단에 ‘포획된’ 상임위와 일부 부처를 겨냥한 것이었다. 사실 그도 정치학 교과서에서 벗어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창의적 해법’을 구사했다. 상임위 통과 법률의 법률적 적합성만을 따져야 하는 법사위에서 법안의 핵심 내용을 고쳤기 때문이다. 당시 법사위에선 박 장관에게 “맹활약하고 있다” “이제 그만 오시라”는 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는 “행정부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회 상임위를 둔 건데, 위원이 수시로 바뀌니까 전문성을 쌓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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