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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유로 세대 좌절이 그리스 위기 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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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해 유럽 재정위기의 발원지인 그리스에서 ‘592유로 세대’란 시트콤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592유로는 그리스 정부가 정한 25세 이하 청년층 최저임금이다. 한국의 20대 비정규직을 일컫는 88만원 세대와 비슷한 맥락이다. 우연히도 592유로는 지난해 말 환율로 88만3000원이다. ‘592유로 세대’는 일자리가 없어 고단한 청춘을 그린다. 시트콤 작가 람브로스 피스피스는 “592세대가 곧 300유로 세대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위기는 표면적으로 재정 문제다. 정부가 나라의 곳간 관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 요인은 청년실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복지제도를 제대로 운용하려면 지출을 뒷받침할 재원을 지속적으로 충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재원은 새로 취업하는 젊은 세대가 감당할 수밖에 없다. 고용이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다. 그리스는 애초부터 이런 선순환구조가 깨졌다.

 그리스의 청년실업률은 재정위기가 불거지기 전부터 유럽연합(EU) 내 1위였다. 2005년 8월 기준 그리스의 15~24세 실업률은 26.8%에 달했다. EU 평균은 16.4%였다. 이런 좌절에서 촉발된 폭력시위는 2008년 12월 수도 아테네를 마비시켰다. 지난해 전 세계를 뒤흔든 점령(Occupy) 시위의 원조인 셈이다.

그리스 정부가 실업 문제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향이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스는 청년실업을 예산으로 막으려 했다.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을 늘렸다. 당장 효과가 나긴 했지만 후유증이 컸다. 취업자 4명 중 한 명이 공공기관 근로자였고 인건비 부담은 정부 재정을 옥죄었다.

 ‘파켈라키(작은 봉투)’로 상징되는 부패도 청년층의 좌절을 부추겼다. 부패로 인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고, 연줄이 없으면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운 게 그리스였다. 대학원까지의 무상교육을 통해 길러 낸 인재들은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재정위기는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2009년 그리스의 경제성장률은 -2%, 2010년은 -4.5%였다. 경제가 뒷걸음질치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일자리가 더 줄었다. 최근 그리스의 청년실업률은 40%대로 치솟았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그리스에선 실업자가 늘면서 정부 지출 부담(실업수당)이 증가하는 이중의 부담이 생겼다”며 “유럽 재정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일자리 창출을 통한 세수 확대”라고 말했다. 그리스 사태는 청년 일자리를 만들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내일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특별취재팀=김종수·김영훈·채승기·김경희·이가혁 기자, JTBC 편성교양국 다큐멘터리 ‘내·일’ 제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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