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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비대위, 경박한 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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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가 최구식 의원에게 탈당을 권유한 것은 직권남용이다. 당에는 외부 인사 5명을 포함해 9명의 윤리위가 있다. 최 의원을 문책하려면 비대위는 윤리위에 회부해야 한다. 윤리위가 최 의원의 설명을 듣고 징계 여부나 수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경효(고려대 교수) 윤리위 부위원장은 “비대위 결정은 정상이 아니다”고 지적한다. 당 윤리위는 허수아비인가. 박근혜의 원칙은 어디 갔나.

 미국 공화당은 닉슨의 워터게이트로 정권을 잃었다. 민주당은 클린턴의 성(性)추문으로 정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당은 닉슨과 클린턴에게 탈당을 요구하지 않았다. 영광의 영웅이든, 오욕의 죄인이든 동지를 끌어안은 것이다. 냄비 같은 한국 정당 풍토에서 이런 공동책임 의식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더라도 동지의 소명(疏明)을 듣거나 사실관계 확정까지 기다리는 게 최소한의 도리다. 최 의원은 ‘9급비서가 한 일을 몰랐지만 검찰 조사가 끝나면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입장 아닌가. 그런데도 비대위는 ‘8년 국회의원 동지’를 가볍게 죽였다. 이런 비대위는 쇄신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이상돈 비대위원은 정당·공천개혁 소위원장이다. 그의 임무는 공정한 공천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특정인의 공천 여부는 공천심사위가 할 일이다. 그런데도 이 위원은 마치 자신이 결정권자인 양 행세한다. 특정 세력의 불출마를 주장하면서 대표적으로 이재오 의원을 공격한다. 정권 실세로 국정 실패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의원이 국정 혼란에 상당한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는 2008년 박근혜 그룹 공천 학살을 주도해 여권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이런 잘못으로 그는 낙선했다. 일종의 죗값을 치른 것이다. 하지만 이 의원은 2010년 7월 재·보선으로 재기했다. 낮은 자세로 임해 모처럼 당에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런 그를 공천할지는 심사위가 정하는 것이다. 그의 잘못이 크면 심사위가 떨어뜨릴 것이다. 공천돼도 최종 심판은 유권자가 한다.

 이상돈 위원은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을 탈당한 무소속 이회창을 적극 도왔다. 한나라당으로 보면 ‘해당 행위자’의 브레인으로 활동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점령군이 되어 절차를 무시하고 특정인 불출마를 주장한다. 이런 이상돈 위원은 쇄신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김종인 위원은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의 경제수석일 때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2억1000만원을 받았다. 집행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그는 징역형(2년6개월)을 살았다. 그는 5공 세력이 만든 민정당에서 8년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17대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만든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가 됐다. 그는 최근까지 안철수 교수의 중요한 멘토(mentor)였다. 그런데 지금은 박근혜 옆에 붙어 있다. 그러면서 ‘인적 쇄신’을 외친다. 이런 김종인 위원은 쇄신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박근혜 비대위는 그야말로 비상한 요구 속에서 출발했다. 당은 인공호흡기를 잡는 심정으로 박근혜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한나라당을 넘어 한국 정치 개혁의 중요한 실험이기도 하다. 그런 비대위가 도덕과 원칙에서 ‘쇄신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일부 위원이 퇴진을 요구하는 인사들에게는 적어도 그들 같은 이상한 변신이나 부패는 없다. 이런 비대위는 혁신은커녕 오히려 당의 타락에 면죄부를 줄 것이다. 뇌물 받아 감옥에 갔던 이가, 이 당 저 당을 거친 이가 “나도 공천받겠다”고 덤비면 비대위는 뭐라 할 것인가.

 비대위를 보면 박근혜는 2004년 천막 당사를 지키던 잔다르크가 아닌 것 같다. 안철수를 의식해서인지 흔들리고 있다. 10여 년 된 원칙의 정치가 몇 달 새 편법의 정치로 바뀌고 있다. 박근혜는 비상한 각오로 비대위부터 쇄신해야 한다. 완장이 잘못 배달됐다면 회수해야 한다. 탈당 권유를 거두고 최 의원을 윤리위에 맡겨야 한다. 비대위는 이미 동력을 잃고 있다. 이대로라면 혁신은 달아나버릴 것이다. 혁신이 도망가면 박근혜의 정치 생명도 같이 갈지 모른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