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부모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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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선희
논설위원

내일은 성탄절 전야(前夜)입니다. 이 즈음에 특별한 어머니 한 분을 생각합니다.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천사에게서 잉태 소식을 듣고, 그 운명의 아기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인류 역사상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태어난 적이 없었던 유일한 아들을 낳고 길렀으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 속에 십자가를 지고 숨지는 아들을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입니다.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자식의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히면, 부모에게는 가슴에 뾰족한 것이 꽂히는 고통으로 증폭된다는 것을요. 누군가 가슴으로 피울음을 울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인생이며, 하늘이며, 모든 것이니까요. 그러니 성모 마리아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까요. 오직 인간을 사랑하는 일밖에 하지 않았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산으로 오를 때, 그 어머니는 자신의 십자가 위에 아들과 아들의 십자가까지 보태서 짊어지고 그 산을 올랐을 것입니다. 예수에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 하나하나가 그 어머니의 온몸에 표창처럼 박혔을 겁니다.

 이 즈음에 두 아버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나영이의 아버지와 ‘나영이’ 노래를 불러 논란을 일으켰던 가수 알리의 아버지입니다. 두 아버지는 ‘위대한’ 딸을 가진 분들입니다.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도, 그것을 극복하고 세상을 살아내고 또 세상에 나설 수 있는 건 분명 위대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위대한 사람의 부모는 그들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식이 시련과 좌절과 고통을 겪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처절한 일입니다. 두 아버지는 바로 그런 아버지들입니다.

 알리는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고통을 극복하는 상징적인 노래로 ‘나영이’를 작사 작곡해 발표했습니다. 그것으로 나영이 부모의 상처를 건드렸습니다. 알리에겐 네티즌들의 엄청난 비난과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욕먹는 딸을 위해 아버지가 나섰습니다. 떠올리기도 싫은 딸의 성폭행 사실을 아버지의 입으로 발표하고, 사죄도 했습니다. 이제 막 고통을 극복하고 세상에 나온 딸에게 세상의 질타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는 그 아버지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영이 아버지는 알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딸과 똑같은 일을 겪은 또 한 명의 딸이 어떤 세월을 살아왔을지, 그 부모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지,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나영이 아버지는 자신이 상처 입은 또 한 명의 딸에게 또 다른 상처를 안긴 것 같은 자책의 짐을 하나 더 짊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부모들이 자기 상처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고 난 뒤에야 가볍게 욕했던 사람들은 가볍게 털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뒤에도 말을 거둬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이 즈음에 예수를 비난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누구든 가차없이 욕하고 단죄하려는 수많은 악플러의 부모들을 생각합니다. 부모는 늘 죄인처럼 불안합니다. 언제든 잘못될 수도, 잘못할 수도 있는 자식들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욕을 먹을까봐도 걱정이지만, 남들에게 욕을 해대는 사람이 될까봐도 걱정입니다. 내 자식이 무리에 휩싸여 가서 예수에게 욕을 할까봐, 삶이 고달픈 사람을 향해 혀를 놀려 그의 등을 밀어 떨어뜨릴까봐 걱정입니다. 어설픈 선으로 남을 단죄하고, 해코지하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 가슴에 와서 꽂힌다는 것을 알고 있어 걱정입니다. 진정 가치 있는 사람들은 남을 탓하고 욕하는 게 아니라 우직하게 자기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자식이 누군가를 비난하면 가슴이 툭 떨어집니다.

 남들을 비난하고 욕하기 전에 부모님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들을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은 바리사이파의 부모로 살게 해도 좋은 것인지 말입니다. 성탄입니다. 올핸 휘황한 크리스마스 장식도 캐럴도 뜸하군요. 이런 때일수록 밝고 맑은 심성과 말을 부모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챙겨드리면 어떨까요.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