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노 히데아키 〈신세기 에반게리온〉

중앙일보

입력

1995년 모 TV사는 괴상한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다. 앞도 뒤도 없고, 도대체 정리도 되지 않던 이 애니메이션은 방영 초기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자칫 제작사는 빚더미에 앉을 판이었고, 사실 애니메이션 제작 중반까지 제작사와 감독은 빚에 쫓기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후반에 가면서 B화면(블랙의 바탕색)이 많아지는 것은 빚 때문에 제작비가 모자라서라는 낭설도 돌았다.

그러나 어느새 이 작품의 시청률은 타방송국에 압도적인 차를 내면서 독주하고 있었다. 재방송 문의가 쇄도했고, 동시간 대에 한번, 새벽 2시의 애니메이션 시간에 2번 재방송했다.

재방송 때에도 시청률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고 사회 현상까지 일으켰다. 덕분에 제작사와 TV사는 많은 이윤을 남겼고, 제작사는 이 분위기를 틈타서 극장판 2개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었다. 극장판 쪽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성공했다.
이듬해 〈원령공주〉가 기록을 깰 때까지, 헤이세이(일본 연호) 시대 최고 관객 동원 수를 기록한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이것이 제작사, 가이낙스와 방영사 동경 TV, 그리고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어버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걸어온 길이다.

자칭 '나, 일본 애니 좀 봤다.'는 사람 중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 만큼 우리 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도 유명한 애니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국내 출시된 〈에반게리온〉은 완전 아동용으로 제작되어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 작품이 성인용이라는 사실을 몰라서였을까. 비록 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스토리 전체는 성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진행되고 있다. 그런 점은 이 애니메이션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먼저 이 애니메이션, 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난해하다. 이 애니메이션을 이해하려면 구약성서를 2번쯤은 읽어야 한다고 한다. 아니 더욱 자세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지나가는 '안노 히데아키'(감독)를 붙잡아서 그 사람 뇌속을 철저히 해부하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그 만큼 수많은 복선과 밝혀지지 않는 과거와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이 얽히고 설켜서, 에바 전체를 어렵게 하고 있다.

어른의 러브스토리도 많이 나온다는 점이 이 애니가 성인용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카지와 카츠라기의 관계, 이카리 겐도우와 아카기 박사 모녀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카지와 카츠라기의 섹스 장면은 TV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본에서도 최초의 시도였다. 나쁘게 말하자면 시선 끌기 위해 온갖 것을 보여줬다고 하겠지만, 좋게 말하자면 새로운 모습을 들어냈다고 하겠다. 그런 어른들의 사랑의 틈속에서 어른이 되지 못한 아스카와 신지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 듯한 구성이다.

초극단적인 세기말 붐을 일으킨 극장판에서는 TV판에서 줄곧 언급하면서 어중간하게 끝내버린 '인류 보완 계획'의 결말을 다루고 있다.

그곳에 등장하는 마지막 사도는 '인간'. 결국 인류의 적은 인류인 셈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사도인 나기사 카오루가 이야기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마음의 벽, AT필드를 허무는 것이 단종 생물로서는 진화의 끝에 놓인 인류가 추구해야할 목표라고 제레는 '인류 보완 계획'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의 열쇠를 쥔 신지는 그것을 거부한다. TV판에서 신지가 LCL 속에 녹았을 때 카츠라기, 아스카, 레이가 '나와 하나가 되지 않을래?'라고 묻는 것에 대답하려는 찰나 들려온 어머니 이카리 유이의 목소리처럼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십자가가 지구를 덮은 속에서 새로운 아담, 신지와 이브, 아스카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려는 것을 끝으로 기나긴 에반게리온 스토리는 끝이 난다.

지금까지 엄청 줄인 〈에반게리온〉 월드를 탐험했다. 모든 것을 풀어내려면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중편 소설 한 편이 될 정도이다. 이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나머지는 각자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길 바란다. 할 수 있다면 원판으로.

20세기말, 극단적 세기말 현상을 보여준 이 작품은 가이낙스의 이름과 함께 애니메이션의 역사 속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그런 작품을 안보고 넘어갈 것인가,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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