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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세밑 휘호가 궁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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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재숙
JTBC 보도국 문화팀장

올 2월 한국을 찾았던 양제츠(楊) 중국 외교부장은 원래 지난해 11월 26일 방한하기로 돼 있었다. 중국 외교부는 출발 이틀 전 양제츠 외교부장의 방문 연기를 알려왔는데 불가피한 일정 때문이라는 설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늦은 밤, 중국 측이 갑작스러운 통보를 한 배경에는 그날 오후 발표된 한·미 서해 합동훈련이 있었다.

 당시 회담과 의전을 준비하던 실무자들이 허탈하게 손을 털고 있을 때 더 큰 한숨을 내쉬던 이들이 있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관계자들이다. 1주일 전쯤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가 서예박물관을 답사 차 찾아와 전한 양제츠 외교부장의 뜻이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평소 서예에 깊은 관심을 지녔던 양제츠 본인이 바쁜 일정을 쪼개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서예박물관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는 붓글씨를 꽤 잘 쓴다고 알려졌는데 측근들에게 ‘동아시아 문화의 공통분모인 서예, 즉 문화로 정치문제를 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지난 2월 서울에 온 양제츠 외교부장의 스케줄에는 서예박물관 관람이 없었다. 양국의 정치인들이 붓을 들어 필담을 나누며 한자문화권으로 하나인 두 나라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나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교 20주년을 눈앞에 두고 벌어진 베이징 한국대사관 건물의 쇠구슬 피격, 환구시보(環球時報)의 악의적인 보도 등을 보면 더 아쉽다. 한국과 중국 두 나라 국민의 깊은 문화적 이해가 강물처럼 넘쳐 정치외교의 살벌한 둑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10월 취임 뒤 첫 외국 방문지로 한국에 온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도 서예 애호가다. 노다 총리는 독특하게도 한국 서예가가 쓴 글씨 한 점 얻기를 원했다고 한다. 청와대는 국빈 선물로 원로 서예가 우죽(友竹) 양진니 선생의 행서 ‘소지관철(素志貫徹·사진)’을 택했다. 소지관철은 처음 세웠던 순수한 뜻을 끝까지 관철한다는 뜻. 일본의 전통 깊은 지도자 양성소인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으로 첫 일본 총리가 된 노다는 마쓰시타의 오서(五誓) 중 첫째를 가슴에 새겼던 모양이다.

 17일부터 답방 형식으로 이틀간 교토를 방문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 맹세를 마음에 품고 있을까. 그는 5년 전인 2006년 12월 18일자 중앙일보 4면 ‘대선 1년 남았다’ 기획에서 대선후보로서 ‘내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를 이렇게 요약했다. “오늘을 돌아보면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 일자리와 주택·사교육비 문제… 국민은 뭔가 변화를 기대하고… 이 절실한 염원에 답해야 할 정치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대통령 임기 1년 남았다’란 기획을 지금 한다면 그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은 통치의 근간을 ‘손상익하(損上益下)’라 했다. 잘사는 이의 것을 덜어내 못사는 이에게 보탠다는 의미다. 오늘로 이야기하자면 양극화를 해소할 처방전이다. 내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바라보는 이 대통령의 세밑 휘호로 이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정재숙 JTBC 보도국 문화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