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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장작불 쬐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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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기택
시인

다시 겨울이다. 추위도 오고 돈 걱정도 오는 겨울이다. 새해도 오고 후회도 오고 새로운 결심도 오는 겨울이다. 겨울도 매년 조금씩 변한다. 요즘의 겨울 추위는 옛 추위와 다르다. 살이 트고 동상이 생기던 사나운 옛 추위는, 난방시설을 잘 갖춘 실내에서 창밖을 구경하는 안락한 추위로 바뀌었다. 그래서 옛날에 쬐던 장작불이 생각난다. 장작불은 더위와 추위를 동시에 맛볼 수 있다. 겨울의 무시무시한 추위를 생생하게 느끼면서 그 추위가 몸에서 녹는 것을 낱낱이 느낄 수 있다. 한 몸에서 겨울의 맹렬한 추위와 불의 뜨거운 힘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장작불은 가까이 가면 뜨겁고 멀리 물러서면 춥다. 앞을 쬐면 등이 춥고 등을 쬐면 앞이 춥다. 그래서 고구마나 생선을 뒤집고 돌리면서 골고루 굽듯이 몸을 계속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추위가 녹는 제 몸을 즐겁게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장작불에 온몸을 굽고 나면 불을 떠나 다시 찬바람 앞에 서더라도 내장까지 뜨끈해져서 한참 동안 몸 안에서 온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일러스트=백두리]

 장작불은 몸만 따뜻하게 하는 게 아니다. 불구경, 그거 참 신나는 일이다. 불줄기의 힘차고 울퉁불퉁한 근육과, 날씬한 허리가 추는 유연하고 날렵한 춤은 눈을 취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불꽃의 움직임은 한 동작 같지만 한 번도 같은 동작이 없다. 단순한 동작 속에 수많은 변화무쌍이 있다. 불의 혀들이 한꺼번에 나무에 달려들어 장작의 살을 뜯어내고 삼키고 핥는 듯한 식욕은 또 얼마나 탐스러운가. 불의 혀가 지나간 자리에는 뼈도 남지 않는다. 그 맹렬하고 게걸스러운 식욕을 구경하고 나면 실컷 먹은 것처럼 배불러진다.

 장작불의 음악은 또 어떤가? 활활 타오르는 부드럽고 무서운 소리 속에서 나무가 뻥뻥 터지는 박력 있는 리듬이 나온다. 마치 오케스트라 속에 대포가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음악은 내 마음에서 나오지 못하고 소리 지르고 싶던 것들을 나 대신 후련하게 내질러 주는 것 같다. 장작불 냄새는 또 어떤가? 맵고 구수한 나무 향에 내 몸이 훈제되는 느낌. 매운 맛은 눈물을 흘려가며 눈으로 먹고 구수한 향은 코와 피부로 먹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면 구리고 비리고 누릿한 몸과 마음의 냄새가 싹 씻겨나가는 것 같다.

 나무는 제 몸을 태우면서 ‘기억의 춤’을 춘다고 함민복 시인은 노래했다. 나무가 일생 동안 경험한 햇빛, 공기, 물, 비바람 등의 기억은 음반처럼 나이테에 저장되었다가 불에 탈 때 음악이 재생되듯 살아나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새의 날갯짓 활활/ 눈비바람 꺼내 불바람/ 흔들림에 대한 기억으로 흔들리며/ 불꽃은 타오른다// 출렁출렁/ 빛 그림자/ 달빛도 풀린다”(‘원을 태우며’)는 것이다. 장작불은 자연에서 받은 것을 남김없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장엄한 다비(茶毘)의 춤이다. 추위를 녹이는 열과 은은한 향과 찬란한 빛이야말로 나무의 무욕의 삶이 남긴 사리가 아닐까.

 또 한 해가 지는 겨울이다. 한 해를 돌아보며 ‘땀을 흘리며 뜨겁게 살았는데 왜 몸은 여전히 추운가’ 하고 묻고 싶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 답이 듣고 싶다면 혀가 만드는 언어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장작불을 쬐어 볼 일이다. 어떠한 고정관념과 선입견도 없이 풍부한 의미를 제 안에 품은 불의 말을 들어볼 일이다. 오로지 힘차고 아름답게 타는 일에만 전념하고 뒤에 남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불의 말을 들어볼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뜨겁게 태운 올해도 그 장작불처럼 사라지려 하고 있다.

김기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