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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롯데호텔 38층…박지원 옆엔 김영완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박지원 당시 문화부 장관(현 민주당 의원)과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사망)이 해외에서 세 차례 접촉할 당시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물론 무기중개상인 김영완(58·사진)씨가 모두 합류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당시 현대의 대북 사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재일동포 사업가 A씨는 5일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1999년 12월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대리인을 한국에 보내 박 장관과 접촉할 때도 김씨와 이익치(67)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 롯데호텔 38층의 회담 장소에 줄곧 동석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대북송금의 핵심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2003년 3월 특검의 수사가 시작되기 직전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8년8개월 만인 지난달 26일 귀국해 대검에서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출국했다. 박지원 전 장관은 대북송금 사건 공판에서 “회담 때 김씨를 본 것은 맞지만 우연의 일치이며 나와는 무관하다”고 밝혔으며, 정몽헌 전 회장도 “김씨가 회담장에 있었던 건 현대 측과 무관하다”고 말한 바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A씨와의 일문일답. ※표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임.

 -김영완씨를 직접 봤나.

 “정상회담이 열리기 6개월 전인 99년 12월 롯데호텔 38층으로 기억하는데 무슨 멤버십 라운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 층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 방으로 안내받아 가니 박지원 장관과 처음 보는 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다. 박 장관 곁에 딱 붙어 있는 데다 175~176㎝ 정도의 키에 다부진 몸매여서 박 장관의 보디가드인 줄 알았다. 그가 미국에 사는 무기중개상이라는 사실은 이듬해 3월의 1차 (남북) 싱가포르 예비 접촉에서 만나 비로소 알게 됐다.”

- 이후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의 협상 과정은 어떻게 됐나.

 “박 장관으로부터 (정상회담 의지를) 확인받은 사실을 바로 북한에 보고했다. 이어 2000년 3월 9일께 싱가포르의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2박3일간 1차 (남북 예비) 협상이 이뤄졌다. 협상장에 들어간 건 한국 측에서 박 장관과 국정원의 간부 2명이었다. 북한은 송 부위원장과 양복을 입은 군부 인사 등 4명이었다.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 김영완씨는 호텔 커피숍이나 별도 숙소의 방에서 줄곧 대기했다.”※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저서 『피스메이커』에 따르면 참석 국정원 간부는 김보현 3차장(북한 담당)과 서훈 대북전략 국장이다.

 - 베이징에서의 3차 협상에서 타결됐을 때의 상황은.

 “싱가포르에 이어 3월 17일에 열린 2차 상하이 협상도 결렬됐다. 별도로 현대와 북한 측은 베이징 현대지사 인근의 쿤룽호텔에서 물밑 조정작업을 계속했다. 나도 여러 번 북한을 다녀왔다. 4월 8일 베이징의 차이나월드호텔에서 밤샘 협상 끝에 아침 8시쯤 최종 타결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대기하던 나나 정 회장, 김영완씨 등 민간인들은 모두 ‘자, 이제 우리 흩어집시다’ 하고 오전 9시쯤 공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 어떻게 정상회담이 추진된 것인가.

 “현대는 98년 11월부터 금강산 사업을 했는데 금강산의 숙소가 여의치 않아 싱가포르에서 유람선을 가져와 호텔로 삼고 카지노도 하려고 했다(※유람선은 ‘해금강 호텔’로 사용됨). 김정일 위원장도 99년 8월 말인가 현지(금강산)에 시찰을 왔고, ‘관광은 여자도 필요하고 술도 필요하고 카지노도 필요하다’며 현대와 모종의 사인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대는) 특구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권리금도 3억 달러 건넨 것으로 안다. 그런데 카지노도 제대로 허가가 안 나오고 북한 내에서도 제대로 진전이 없으니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이 ‘이건 안 되겠다. 톱(정상) 회담 아니면 안 되겠다’며 나를 통해 북한에 설득을 부탁한 것이다. 당시 현대는 북한에서 협상할 때 화가 나 ‘이들과는 거래 못하겠다’며 소형 비행기를 7000달러에 전세 내 베이징으로 돌아간 적도 있다.”

 -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북한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86년 4월께 도쿄의 데이코쿠(帝國)호텔에서 재일동포 사업가 손달원씨가 나를 정 회장에게 소개했다. 당시 정 회장은 북한 방문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내가 북한에 들어가 허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담판을 짓고 정 회장의 방북을 89년 1월 23일 성사시켰다.”

 - 북한에서 정 회장을 어떻게 대우했나.

 “당시 러시아 모스크바에 체재하던 정 회장이 현대건설 부사장급 임원과 김윤규 부장(이후 현대아산 부회장) 등 5명가량과 일본 나리타(成田)공항으로 왔다. (여기에) 나와 손달원씨가 합류해 베이징을 통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면담을 거부했다. 김 주석은 정 회장이 돌아가는 날 아침 꿩고기를 그의 숙소인 대동강 인근 초대소로 보내 예를 갖추려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 주석이 면담을 하지 않은 것은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 내부적으로 정해진 상황에서(※3월 25일 방북함) 정 회장을 만날 경우 정 회장에게도 부담을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당시 현대가 북측과 체결한 의정서는.

 “허담 위원장이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며 39호실(※김정일 비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부서)의 최수길 부부장을 데려와 의정서를 썼다. 당시 정 회장은 의정서에 사인을 하는 현대건설 부사장에게 (의정서 사인은 원래 사장이 하는 것을 빗대) ‘당신 오늘부터 사장이야’라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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