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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어머니의 이름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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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교수 매체경영

해마다 겨울이 오면 어머니는 옷장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그런 고향집의 옷장에는 어머니가 차곡차곡 쌓아둔 많은 옷이 있다.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유년 시절 옷들은 여전히 서랍장에 재어져 있다. 그저 1년에 몇 차례, 명절 때나 들르는 고향집, 우연히 발견한 서랍장 속 유년기의 옷들은 한순간 나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한다. 지금 보면 촌스러운, 디자인 개념이 아예 없는 옷들이다. 그런 유치한 옷들이지만 여전히 고향집의 야위어 가는 서랍장에서 숨쉬고 있다.

 그러나 한때는 4남매가 법석거렸던 커다란 집은 이제 달랑 두 노인네가 사신다. 어릴 적 내 방의 천장 구석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한껏 폼을 내며 비춰보던 거울은 군데군데 벗겨져 흉한 모습이다.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했던 아기 전나무는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었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으로 물들던 마당 구석 은행나무는 이제 어른 몸통만큼이나 굵어졌다.

 고향 집은 하루가 다르게 남루해 간다. 집과 함께 늙어가는 나무서랍장에는 아주 낡아 해진 빨간 오리털 파카가 하나 있다. 보푸라기가 비집어 나오는,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 버릴 만한 낡은 옷이다. 어머니는 이 옷만큼은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간직하고 계신다. 옷의 역사는 30년, 나는 이 옷이 던지는 의미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러스트=백두리]

 30년 전이다. 지금이야 오리털은 물론 보온성이 훨씬 좋다는 거위털 옷까지 넘치는 세상이지만 30년 전 이 땅에는 오리털로 만든 옷 자체가 없었다. 1980년대 초 한겨울, 나는 우연히 동대문시장을 지나가게 되었고 상점 주인으로부터 색다른 옷을 권유받았다. 오리털 파카였다. 오리털로 옷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은 그 시절, 주인은 보세품임을 유난히 강조하며 미국 부자들이 입는 겨울 옷인데 어찌어찌 자신의 가게에까지 들어 왔다는 것, 그리고 엄청 따뜻해 눈 속에 뒹굴어도 땀이 난다는 둥 허풍까지 곁들여 입어보라고 권한다. 입어보니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다. 당장 가진 돈이 없었던 나는 다음 날 오겠다고 약속하고 그 옷을 팔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다. 다음 날 그동안 과외해서 꼬불쳐 놓은 돈을 몽땅 들고 가서 문제의 오리털 파카를 구입해 고향의 어머니에게 부쳤다. 그 빨간색 오리털 파카는 여성용이었던 것이다. 며칠 뒤 어머니가 들뜬 음성으로 전화해 오셨다. 살아생전 이렇게 따듯한 옷은 처음 보았다는 놀람의 목소리였다. 그날 이후 겨울이 오면 어머니는 늘 아들이 사준 오리털을 입고 나들이 가신다. 친구분들께 자랑하고 싶으신 것이다. 오리털 옷이 일반에 널리 보급되기 전 서너 해 동안 어머니는 겨울이 되면 오리털 파카만 입으셨다.

 그러나 오리털 파카는 이제 너무 낡았고 동생들이 훨씬 가볍고 좋은 것들을 번갈아 장만해 드려 집안에 오리털 옷이 넘친다. 하지만 너무 낡아 입기 곤란한 그 옛날 오리털 파카는 서랍장에 고이 모셔져 있다. 나는 그만 버리시라고 주장하지만 어머니는 펄쩍 뛴다.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이 곤고한 시절, 과외 삯으로 사서 보내온 그날을 기억하고 싶으신 게다.

 겨울이다. 거리를 지나다가 빨간 오리털 점퍼만 보면 내 20대의 오리털 파카가 생각난다. 그런 나의 어머니는 이제 여든을 바라보시고 난생처음 본 오리털 옷에 신기해하던 그때의 청년도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도심 성탄 점멸등이 오늘따라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메리 크리스마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교수 매체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