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SNS 정치 발언외국에선 어떻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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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40대, 관심사 민주주의, 평등, 복지, 무상교육, 무상의료’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45·사법연수원 22기)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 계정(@choieunbae) 자기소개란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팔로어(follow) 수는 지난 3일 기준 3만358명. 지난해 3월 트위터에 가입해 고작 8개의 글을 올렸을 뿐인데 불과 일주일 사이에 30여 명에 불과하던 추종자 수가 급증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한·미 FTA 반대 발언을 했다는 내용이 알려진 뒤 일어난 현상이다.

최 판사는 지난 10월 30일엔 이런 글을 올렸다. “어제 세미나에서 배운 것. 정교분리 원칙이 있다고 해서 공무원에게 특정 종교 신봉을 금지하지 않듯이 공무원에게 정치적 중립이 요구된다 하여 공무원이나 교사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당연히 금지된다고 볼 것은 아니라고 한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불법후원금을 낸 교사와 공무원들이 무더기로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 판사가 특정 사안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밝힌 건 처음이 아니라는 얘기다.

외국 판사들, 정치 행동 자유로운 편

지난달 29일 대법원은 공직자 윤리위원회를 열었다. 최 부장판사의 페이스북 발언으로 야기된 법관의 SNS 사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도 응당 의제에 포함됐다. 회의 뒤 대법원은 “법관의 품위 유지 의무는 사적 영역에서도 요구된다”며 “이용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판사들의 SNS 사용 가이드라인을 만들겠다는 방침도 내놨다. 그러자 일선 판사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서기호(41·연수원 29기) 서울북부지법 판사는 “단순 권고가 아닌 통제지침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며 반대 의견을 내부 게시판에 올렸다. “윤리위 권고 사항은 페이스북 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했다.

최 부장판사는 이에 대해 “이번 일은 판사를 비롯한 공무원들의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공무원의) 정치 표현의 자유가 심하게 구속돼 있는데, 민주화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문제는) 생각지 않고 있다”고 했다. 또 “외국에선 자기 목소리를 내는 판사들의 단체가 있다”면서 “신영철 대법관 사건(2008년 촛불재판에 대해 개입을 했던 일을 지칭)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다른 나라는 법관협회에서 성명서를 냈을 것”이라고도 했다.

실제로 외국은 판사들의 정치행동이 자유로운 편이다. 미국은 2002년 사회적 쟁점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을 금지했던 법관윤리규정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위헌을 선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선 올 2월 판사들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사법기관을 경시하는 발언을 했다는 데 집단 반발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콜롬비아에선 2008년 판사와 법원직원들이 ‘급여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미 판사, 페이스북 글로 물의…사퇴

상반되는 사례도 있다. 200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지방법원의 비 칼튼 테리 주니어 판사는 ‘페이스북’때문에 사법기준위원회로부터 “법관을 오명에 빠뜨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아들의 양육권을 누가 가질 것인지를 놓고 부모가 다투는 사건을 맡고 있을 때였다. 테리 판사는 우연히 판사실에서 양측 변호사들과 대화를 하다 페이스북 이야기를 하게 됐다. 어머니 측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시간이 없어서 페이스북을 할 시간이 없다”며 무심하게 반응했지만, 아버지 측 변호사는 테리 판사의 페이스북 언급을 넘겨듣지 않았다.

곧장 테리 판사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한 것. 이후 이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상대방이 바람을 피웠다”는 재판상 증언에 대해 글을 올렸다. 친구가 된 테리 판사는 답글을 적었고 변호사는 여기에 “나는 현명한 판사를 만났다”는 글을 남겼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사법기준위원회는 테리 판사의 페이스북 사용에 문제를 제기했다. “사건 당사자 일방에 치우친 소통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판사의 SNS 사용이 문제가 된 또다른 사례도 있다. 지난해 미국 조지아주에선 어니스트 버키 우즈 판사가 페이스북에서 만난 사람에게 돈을 받고 자문을 해줬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했다.

전국 판사 400여 명으로 구성된 사법정보화연구회 회장 노태악(49·연수원 16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사건 당사자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판사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이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부장판사는 “젊은 판사들이 SNS를 이용하고 있는데 기존에 친했던 변호사들이 재판 결과를 띄우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건 당사자들의 오해를 막기 위해 지난해부터 1년에 2번씩 판사들의 모임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법정보화연구회가 지난 5월 수원지법 판사 10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53.3%(57명)가 법관의 페이스북·트위터 등의 사용에 대해 법관윤리강령 등 통일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김태형(36·연수원 36기) 수원지법 판사에 따르면 법관의 SNS 사용에 대해 권고 지침을 마련하고 있는 곳은 뉴욕, 사우스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켄터키, 오하이오 주 등이다. 이 가운데서도 플로리다주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법관이 법정에 나타날 수 있는 변호사나 당사자를 ‘친구’로 등록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법관의 온라인상 ‘친구 맺기’를 제한한 셈이다. 반면 다른 주에서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권고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 오해받을 언동 경고

일선 판사들의 잇따른 FTA 관련 발언에 양승태 대법원장은 2일 전국 법원장회의에서 “선비는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했다. ‘오해 받을 만한 언동을 삼가라’는 경고 발언인 셈이다.

대법원은 그간 판사들의 의사 표현을 제약하는 데 손을 들어줬다. 2009년 판례를 통해서도 법관들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한계가 있는 것’으로 명시하기도 했다. “특정 사안에 대한 법관의 의견은 사견이라 하더라도 파급 효과가 중대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오도될 수 있는 여지가 크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학계에서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에 해당하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동시에 ‘법관’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대법원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고려대 법대 교수는 “정치적 입장이 확실한 판사가 재판을 맡아 사건을 편중되게 할 가능성이 있다면 스스로 재판을 피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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