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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추억의 그라운드 2. - 박철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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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우리는 그를 ‘불사조’라 부른다. 쓰러지면 끝까지 다시 일어나는 연속된 재기가 그를 불사조 인생으로 만든 것이다.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 하늘로 치솟은 그의 야구인생과 부상으로 헤맨 고통의 나날을 넘어 새로운 야구인생을 준비하는 그를 만나 뒤안길을 돌아보고 박철순을 재조명 해본다.

1. 야구와의 만남.

박철순이 야구공을 만진 건 1967년 부산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이다. 당시 야구부가 창단되었고 박은 쉽사리 유니폼을 입게 된다. 김용희(현 삼성 감독)이 동기였으니 초등학생인 두 사람의 장난기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박철순은 선천적으로 어깨가 강했다. 따라서 야구를 시작한지 1년밖에 되지 않는 시점에서 어린 학생이 지도자의 눈에 쉽게 들리는 없었다. 경남중학교 야구부에 진학한 것은 강한 어깨덕분. 야구선수의 기본적인 자질은 일단 타고난 것이다.

2. 땀범벅이던 학생시절

야구 명문 경남중학교 시절의 박철순은 평범하고 열심히 야구를 하는 선수였고 부산고로 진학을 한다. 하지만 2번의 전학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배명고를 졸업하고 연세대로 진학하며 박철순의 야구인생은 성숙함을 더해간다.

1학년을 마치고 곧바로 공군에 입대전 그는 이기순씨와 결혼한다. 22살의 일이다. 첫 미팅에서 만난 인연이었으니 운명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3. 최동원과의 맞대결

성무(당시 공군 야구단의 지칭)팀은 당시 경리단(육군야구단)과 함께 실업 최강 팀이었고 아마(대학)의 최강 팀은 연세대였다. 당시에는 백호기 야구선수권 대회가 있었는데 실업과 대학의 모든 팀이 출전하여 토너먼트로 자웅을 가리는 대회였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었다.

78년 백호기 결승전 성무와 연세대의 대결, 양팀의 선발투수는 박철순과 최동원이었다. 최동원은 당시 ‘아시아권’에서 가장 이름을 날린 투수였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박은 2-0 완봉승을 일궈내며 한국 최고의 투수 대열에 이름을 올린다.

4. 가시화된 미국행

입신양명에 성공한 박철순이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은 당연한 수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드림팀의 지휘봉을 잡는 코끼리 김응룡감독이 당시에도 대표팀 감독이었으니 시절은 변해도 명장은 그대로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응룡 감독은 네덜란드에서 열린 할렘대회에서 세계 최강인 쿠바전에 박철순을 선발로 등판시킨다. 최동원과 이선희를 아낀 점도 없지 않았지만 박철순을 믿었던 것. 박은 한국 최초의 쿠바전 승리투수로 기록되었다.

79년엔 한-미-일 대학야구선수권 대회가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고, 이 대회에 메이져리그 구단의 스카우터들이 몰릴 건 뻔한 일. 이 때 박철순은 4승을 올리며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듬해인 80년 미국행 비행기에 다시 오른다.

5. 서니박 그리고 귀국

그의 미국 이름은 ‘서니박’이고 등 번호는 21번. 이후 그의 등 번호는 21로 고정되었다. 미국에서 박철순은 새로운 야구를 접한다. 대략 3가지로 요약되는데 무리한 훈련보다 유연성을 중심으로 한 트레이닝을 위주로 한다는 점과 수많은 변화구의 구질이 기본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진정한 승부구는 빠른 직구라는 점이었다.

밀워키브류어즈 산하의 싱글A와 더블A에서 MVP까지 오르며 82년 트리플A의 멤버가 된 박철순에게 한국프로야구의 출범은 선택의 기로였다. 그를 필요로 했던 OB의 초대단장 박용민씨의 인간적 접근이 그를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무튼 박철순은 고국팬 앞으로 돌아왔고 화려한 프로무대는 그를 위한 무대였다.

6. 22연승 신화

82년 프로야구의 시작과 함께 너클볼과 팜볼은 ‘마구’로 불리어졌고, 3월 28일 MBC(현 LG전신)전 완투승을 시작으로 4월 14일 대구삼성전 첫 완봉승. 8월 15일 시즌20승 고지에 올랐고, 9월18일 대전 롯데전에서 세계 신기록인 경이적인 22연승을 올리며 신화를 창조한다.

시즌 24승(22연승) 4패 7세이브. 15완투승에 탈삼진 108개, 승률 .857, 방어율 1.84. 다승-방어율-승률의 3관왕은 물론이고 시즌 MVP까지 거머쥐며 박철순의 전성시대를 예고했고,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까지 누렸으니 그의 한국행은 후회가 없었다.

7. 부상-재기 그리고 부상

8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는 소속팀이던 OB가 1무1패 후 4연승을 거둔 대단원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박철순은 진통제를 맞아가며 무리한 출장을 강행했고(시즌 막판 이미 허리 부상중), 그 후유증은 빙산 속에 파묻힌 거대한 어름 덩어리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OB구단은 시즌이 끝난 후 박철순을 일본 병원에 입원시켜놓고도 언론사에 미국에 남은 짐을 가지러 갔다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83년 2월 8일 대만 전지훈련에서 훈련도중 허리부상을 당하며 고통은 시작되었다. ‘디스크’라는 벽에 부딪힌 것. 하지만 그는 재활을 통해 빠른 회복을 보였고 국민적 관심과 기대 속에 그 해 9월22일 MBC전에 등판했으나 송영운의 직선타를 맞고 그라운드에 쓰러지며 충격을 주었다. 투수의 위치가 얼마나 위험한 자리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박철순의 재기는 등판=승리 공식처럼 그의 성적이 말해준다. 82년 22연승과 더불어 24승을 한 이후 83년 무승. 84년엔 아예 나오지도 못하였고, 85년 재기의 1승에 이어 86년 5승, 87년 2승으로 끈기있게 몸을 추스렸고 88년 재활군 생활에 이어 89년과 90년에 1승과 4승으로 승리의 끈을 이어갔다. 하지만 91년부터 매년 7승씩을 올리며 팀의 노장으로 버팀목역할을 해냈다.

허리부상과 아킬레스건 파열, 디스크재발, 아킬레스건 재파열(CF촬영도중)을 딪고 영원한 에이스로 부상한 것이다.

8. 팀이탈 사건

94년 9월 4일 윤동균 감독의 OB호는 표류하고 만다. 윤감독의 구타로 선수단 17명이 팀을 이탈한 것. 프로선수인 마당에 매를 맞으며 살수 없다는 게 선수들의 항변이었고, 그 주축에 박철순이 있었다. ‘OB사태’로 남아있는 이 사건은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불렀고 17명의 선수는 감봉을 당했다. 한편 강영수가 태평양으로 이적했고 박철순을 포함한 나머지 선수들은 김인식 감독과 함께 OB야구의 재건을 꽤했다.

지금은 윤동균 – 박철순 두 야구인이 기자실 뒤편에서 바로 옆에 앉아 관전평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 흐뭇한 마음이지만 그 당시의 아찔한 순간은 큰 충격이었다.

9. 95우승

95년 박철순은 9승을 올리며 팀의 우승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한국시리즈 최고령 등판의 기록(39세 7개월 8일)까지 갈아치웠고, 우승의 영광까지 후배들과 함께 했으니 그 기쁨은 진정 그 외에는 헤아릴 길이 없을 것이다.

당시 우승 후 박용민 전단장과 얼싸안고 펑펑 운 그의 모습은 진정 4전5기의 결실이라고 하겠다. 노력의 대가가 뒤늦게 찾아왔지만 그 값진 영광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보여준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10. 새로운 박철순을 꿈꾸며

박철순은 요즘 ㈜원영물류의 상무이사로 있으면서 옛 동료인 양세종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스포츠 신문에 관전평을 연재하며 새로운 야구인생을 준비중이다. 수많은 국내외 지도자를 경험한 박철순. 병동을 오가며 수술을 했고, 트레이너와 함께 마운드를 바라보며 긴 재활을 하기도 했던 박철순이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와 선수들과 한 몸을 이룰 채비를 하는 것.

박철순은 열심히 하는 후배를 가장 사랑한다. 그가 후배들을 지도하며 코칭스태프의 일원으로 새롭게 그라운드에 나타나길 많은 팬들은 기대하고 있다. 그는 모든 건 시간 속에 준비가 필요하다며 새로운 야구인생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선수 박철순의 인생은 영광과 고통이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앞으로 그가 새로이 맞을 야구인생도 순탄한 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극복해온 지난날처럼 앞으로 그가 극복해갈 새로운 인생을 우리는 기다려도 좋을 듯 싶다.

◎ 박철순 프로필

생년월일 : 1956. 3. 12
183Cm, 75Kg,
우투우타
종교 : 기독교
출신교 : 배명고교, 연세대
성무(공군)에서 활약
82년 OB 베어스 선수
97-98년 OB 베어스 코치
가족관계 : 부인 채수정씨와 3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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