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주요국 통화가치 급락…외환시장 먹구름

중앙일보

입력

동남아 외환시장이 불안한 모습이다.

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 등 동남아 주요국의 통화 가치가 최근 한꺼번에 급락했다. 3년전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할 때와 비슷한 양상이다.

다른 경제 여건에 차이가 있어 아직까지 제2의 위기를 거론할 단계는 아닌 것 같지만 투자자들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서려있다.

◇ 통화가치 동반 하락〓미국 달러에 대한 필리핀 페소화의 가치는 30개월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으며, 태국 바트화는 9개월, 싱가포르 달러화는 16개월,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16개월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동반 하락세에 불을 당긴 것은 루피아화다. 검찰청사 폭발사고와 시위 등으로 국내 정치가 극심한 불안을 보이면서 지난 6주 동안 루피아화의 가치는 14%나 하락했다.

태국에서도 지난달 야당의원들이 조기 총선을 요구하며 집단 사퇴함에 따라 바트화의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11일에는 심리적 저지선으로 여겨졌던 달러당 40바트를 한때 넘어서기도 했다.

필리핀은 국내 정치 불안에다 재정적자가 심각하고, 경제회복이 더딘 것이 페소화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페소화는 11일 장중에 달러당 45페소를 넘어섰다가 중앙은행의 시장 개입설이 나오면서 44.82페소로 마감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환율은 시장 자율에 맡길 것" 이라며 개입설을 부인했다.

싱가포르의 경우 국내적으로 큰 문제는 없으나 주요 교역국 통화가 불안을 보이는 것에 영향받아 하락세를 보였다.

◇ 외환위기 재발할까〓통화 가치만 놓고 보면 1997년과 비슷하지만 그 배경과 기본 경제여건에는 차이가 있어 제2의 위기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분석했다.

가장 근본적 차이는 외국 투자가들의 움직임이다. 97년에는 통화 가치가 급락함에 따라 외국인들이 서둘러 투자금을 거둬가느라 위기가 증폭됐다.

그 이후 외국인들은 이들 국가에 대한 투자 비중을 꾸준히 줄여왔기 때문에 외환이나 주식시장에서 투매사태가 빚어지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UBS 워버그의 외환 분석가인 만수르 모히-우딘은 "3년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에는 헤지펀드들이 이들 국가에 매우 공격적으로 투자한 상태였다" 며 "지금은 투자가들이 내다팔고 싶어도 팔 것이 많지 않다" 고 주장했다.

다만 이들 국가의 구조조정 속도가 느려진 것은 문제로 꼽힌다.

아시아 위크는 14일자 최신호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에서 일단 한숨을 돌리면서 위기에서 배운 교훈을 벌써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쟁력 없는 금융기관.기업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필요한 개혁이 미뤄질 경우 경기 회복이 둔화되고 제2의 위기가 닥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아시아 지역의 신디케이트 론이 급증하면서 역내 기업들의 외채 의존도가 다시 높아지는 것도 불안 요인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금리가 올라갈 경우 들어왔던 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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