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다스릴 날 기다렸나…1919년 영친왕 수첩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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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농업을 구하자. (…)국방 필요상 힘들어도 국내에서 농업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교육은 모방, 수입교육이다. 제도, 방법도 모두 서양과 닮아 있다. 국민의 성장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서양 것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다. 종래부터 모방성이 풍부한 일본인은 특히 이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1897~1970)은 1919년 유럽·미주 지역을 순방하며 느낀 바를 휴대용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 나라를 다스릴 날이 오리라 생각했을까. 이루지 못한 황태자의 꿈은 명함만한 수첩 안에서만 날개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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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정웅 기증전-순종 황제의 서북순행과 영친왕·왕비의 일생’이 22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서울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다. 재일동포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하정웅(75)씨가 2008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한 관련 자료 600여 건 중 중요 자료를 선보인다. <본지 2010년 2월 19일자 8면>

 전시에는 영친왕 수첩, 순종(純宗·1874~ 1926)황제가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8일간 서북지역을 순행한 일정을 기록한 사진첩, 영친왕비 일기, 영친왕 내외의 일생을 담은 사진, 황족들이 주고받은 편지 등이 나온다. 기증자료는 외에 영친왕비가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용한 가구와 생활 소품, 손수 만든 자수 병풍과 회화 도구 등도 처음 공개된다.

 순종황제, 영친왕 내외는 불행한 황족이었다. 일제는 서북순행을 통해 단발령을 거부하던 조선인에게 짧은 머리에 서양식 제복을 입은 순종황제의 모습을 보란 듯 보여주고,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걸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통감정치를 정당화하려 했다. 영친왕은 ‘유학’이란 명목 아래 12세이던 1908년 일본으로 끌려가고, 1920년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 결혼한다. 정략일지언정 결혼을 앞 둔 영친왕비의 1919년 일기는 영친왕을 향한 설렘과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하정웅씨는 “한·일 100년 역사가 담긴 자료가 내게 온 건 운명이자 사명이라 생각하고 한국에 가져왔다”며 “양국간 마이너스의 역사 속에 플러스로 나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있음을 양국의 젊은이가 알게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02-3701-7500.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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