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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거 중이거든요” 믿었던 아들의 폭탄선언 하늘이 노래질 일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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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청첩장을 받았다. 신부 측 혼주(婚主) 자리에 친구의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과속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동창 녀석의 큰딸이 곧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상사나 선배들로부터만 받는 줄 알았던 청첩장을 친구로부터 받고 보니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분주해진다.

 지금 아들 녀석은 결혼 당시 내 나이보다 한 살이 많다. 갈수록 만혼(晩婚)과 미혼(未婚)이 대세라지만 녀석은 무사태평하기가 나무늘보 같다. 가끔씩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면 “골치 아프게 결혼 같은 거 뭐 하러 해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투다. 하지만 진짜 속내는 잘 모른다. 이러다 불쑥 사고라도 치는 게 아닌가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저 사실 여친과 동거하고 있거든요.” 어느 날 이런 폭탄선언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하늘이 노래질 일 아닌가.

 마음이 맞는 남녀가 결합하는 방식으로는 결혼이 전부인 줄 알았던 대부분의 우리 세대와 달리 동거에 대한 요즘 세대의 인식은 개방적이다. 한국대학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생의 80%가 동거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부모들의 반대와 외부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실제로 동거를 택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인식과 현실의 괴리다.

 서구 선진국에서 동거는 보편적이다. 유럽 주요국들의 경우 25~45세 성인 중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인구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동거 아니면 독신이다. 결혼에 이른 커플 중 87%가 혼전 동거를 경험할 정도로 동거가 일반화된 프랑스는 아예 동거를 법적인 결합 양태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12년 전 도입된 ‘시민연대협약(PACS·팍스)’이 그것이다. 함께 살기로 한 이성 또는 동성 커플이 팍스에 서명을 하고 법원에 제출하면 사회보장·납세·임대차·채권채무·상속 등에서 결혼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보장받게 된다. 서로 원할 경우 복잡한 이혼 절차 없이 쉽게 갈라설 수 있다는 점이 결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인 남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결합 형태가 결혼, 팍스, 자유동거로 다양해진 셈이다. 결혼보다 팍스를 택하는 것이 요즘 프랑스 젊은이들의 대세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우리 사회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거와 혼외출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보고서를 국책 연구소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았다.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지만 프랑스처럼 동거를 법적인 결합 형태의 하나로 인정하는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 저출산 문제만이 아니라 결혼의 족쇄에 묶여 불행을 참고 사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렇다. 머리로는 이게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내 자식의 문제가 되면 얘기가 달라지니 이율배반도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결혼과 동거, 쉽지 않은 문제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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