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 안목 갖춘 킬러, 모래 위에 환락의 불야성 쌓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1989년 작고한 이탈리아 명감독 세르조 레오네는 84년 상영시간이 네 시간에 가까운 장편영화 한 편을 내놓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다. 영화 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가 만든 주제곡으로도 많이 알려진 이 영화는 19세기 말 미국에 건너온 동유럽 유대인의 미국 정착 초기 실상을 그렸다. 가난하고 무식했던 이들 동유럽 유대인 이민 1세대 중 일부는 뉴욕 맨해튼 로워 이스트 사이드를 거점으로 밀주·매춘·마약·청부살인 등의 범죄로 악명을 떨쳤다. 유대인 마피아 조직은 한때 시칠리아 마피아와도 호각세를 이뤘다. 벅시 시걸은 유대 마피아 중간 보스와 행동 대장으로 특히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벅시는 1906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벤저민 시걸바움이다. 부모는 우크라이나 포돌리아 태생으로 미국 아슈케나지 유대인 선조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이다. 가난했던 부모의 미국 정착 초기에 소년 시절을 보냈던 벅시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거칠고 험하게 사는 길을 택했다. 우선 동네 좀도둑으로 몇 차례 소년원 신세를 졌다. 이후 자동차 도둑과 밀주 판매 등으로 범죄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갔다. 러시아 태생 유대인 루이스 부캘터가 조직한 ‘살인 주식회사(Murder Inc.)’ 소속 킬러로도 악명을 떨쳤다. 미남이었던 그는 여성 편력도 심했다. 그러다 29년 후배 히트 맨의 여동생인 폴란드계 유대인 에스터 크라코프와 결혼했다.

술·여자·도박 … ‘사막의 오아시스’ 개념
벅시는 30년 폭력조직 선배인 벨라루스 태생 유대인 메이어 랜스키와 팀을 이룬다. 랜스키는 이탈리아 마피아 러키(찰스) 루치아노와 제휴해 유대 마피아의 영역을 넓혔다. 루치아노는 저격 위협을 여러 차례 넘긴 전설적 마피아 두목이었다. 그는 폭력과 살인만 일삼던 비조직적 범죄 집단을 기업형으로 만든 인물로 30~40년대 뉴욕 암흑가를 지배했다. 랜스키와 루치아노는 서부 지역 유흥가 장악을 위해 벅시를 로스앤젤레스에 선발대로 파견했다. 당시 LA엔 시칠리아 출신 잭 드라그냐가 캘리포니아 대도시 환락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벅시는 세력 기반이 컸던 드라그냐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그와 공생하면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다.

39년 벅시는 수하 유대인 조직원 해리 그린버그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다. 그린버그는 경찰과 FBI 밀정으로 알려져 조직의 명으로 제거된 것이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기는 했지만 언론은 벅시의 과거 범죄 행각을 폭로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아울러 그에게 ‘벅시’란 별명을 안겼다. 그는 ‘벌레 같은 인간’이란 뜻이 담긴 이 별명을 싫어했다.

벅시는 40년대 초 동부 마피아와 협의차 뉴욕으로 가던 중 라스베이거스에 들른다. 그는 이 쓸모없는 사막 한복판에 카지노 호텔을 세우면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큰 사업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개념이다. 술·도박·여자 이 세 가지를 조합한 환락가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 계획에 회의적이던 조직 수뇌부를 설득해 600만 달러(약 67억원)를 빌려 호텔을 짓는다. 호텔명 플래밍고는 LA에 와서 사귄 영화배우 애인 버지니아 힐의 별명을 딴 것이다. 벅시는 본부인을 버리고 47년 힐과 재혼했다.

자금 압박으로 호텔 공사는 지연됐다. 일설에 의하면 애인 힐이 자금 일부를 스위스로 빼돌렸다고 한다. 뉴욕 마피아의 자금 상환 독촉에 시달리던 벅시는 46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미완공 상태의 호텔을 무리하게 오픈했다. 개관 축제엔 라틴 재즈의 대가인 쿠바인 자비에르 쿠가트, 그리고 클라크 게이블. 라나 터너 등 당대 명배우가 다수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그런데 개관 후 호텔은 파리를 날렸다. 결국 한 달 만에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벅시는 카지노 호텔의 성공을 낙관했다. 그래서 부채상환 연기를 위해 뉴욕 마피아 수뇌부를 설득했다. 47년 3월 호텔 영업이 재개됐지만 영업 실적은 계속 부진했다.

47년 7월 20일 벅시는 LA 베벌리힐스 저택에서 수십 발의 총격을 받고 즉사했다. 총질한 괴한들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뉴욕 마피아 본부의 명령으로 동원된 킬러들이 그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는 벅시를 비호했던 후견인 랜스키가 호텔 건립자금을 댄 이탈리아 마피아의 혹독한 추궁에 몰리자 이를 면하려고 벅시 살해를 솔선 사주했다는 설도 돌았다.

주인 바뀐 ‘벅시 호텔’ 전설적 명물
벅시는 생존 시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른 적이 없었지만 장례식만은 유대교식으로 뉴욕에서 거행되었다. 시신은 할리우드 묘지에 매장됐다. 91년 유대인 영화감독 배리 레빈슨은 벅시의 일대기를 주제로 ‘벅시’란 영화를 만들었다. 벅시의 사후 호텔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뒤 72년 힐튼 호텔 체인에 흡수됐다. 99년엔 라스베이거스에 수개의 카지노 호텔을 소유한 시저스 엔터테인먼트그룹이 다시 인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플래밍고는 라스베이거스 중심가인 스트립의 전설적 명물이 되었다.

미국 유대인 범죄조직은 60년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인원과 조직 면에서 우세한 이탈리아 마피아와의 대결에서 밀렸다. 유대교 랍비들의 순화 노력도 유대 마피아 조직 와해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유대 마피아 1세대들도 자식만은 영재 교육을 시켰다. 그 결과 단 한 세대 만에 의사·변호사·교수 등 전문 직종으로 2세의 직업 전환이 이뤄졌다.

사막 한복판에 자리 잡은 라스베이거스의 개발 초기엔 벅시와 같은 유대인 마피아의 참여가 컸다. 오늘날 라스베이거스는 컨벤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축제의 도시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렇다 할 교육 배경이 없었던 악당 벅시도 유대인의 공통적 적성인 비즈니스엔 선구자적 혜안을 갖고 있었다.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