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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굴복시킨 영국 전몰자 추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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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09년 11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아프간에서 전사한 영국군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기자회견에 양귀비꽃 조화를 가슴에 달고 나온 모습. [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영국인들이 양귀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영국 축구 대표팀이 유니폼에 양귀비 꽃을 다는 것에 국제축구연맹(FIFA)이 제동을 걸자 선수들은 물론 총리와 의원, 고위 관료 등이 항의하고 왕세손 윌리엄 왕자까지 나섰다. 그 결과 FIFA의 결정이 번복됐다.

 사연은 이렇다. 영국 대표팀은 12일(현지시간) 런던의 윔블리 구장에서 열리는 스페인팀과의 친선 경기 때 유니폼에 양귀비 꽃 조화를 달 계획을 세웠다. 양귀비 꽃은 전몰 장병에 대한 추모를 의미한다. 영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11일)이 있는 11월에는 수백만 명이 왼쪽 가슴에 양귀비 꽃 조화를 매단다. 조화 판매 수익금은 재향군인회에 넘겨져 유족들을 위한 사업에 주로 쓰인다. 그런데 지난주 FIFA가 영국팀에 불가 방침을 전달했다. 유니폼에 정치적·종교적·상업적 상징물을 부착할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로 내세웠다. FIFA 관계자는 “향후 종전일 부근에 독일과 경기를 하게 됐을 때 양귀비 꽃을 유니폼에 달면 제1,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을 자극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자 영국 대표 선수들이 잇따라 트위터를 통해 항의의 뜻을 표시하고, 휴 로버트슨 스포츠 담당 차관이 FIFA에 문제 제기를 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냐”며 따졌다. 윌리엄 왕자까지 FIFA에 서한을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하다 숨진 두 친구를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 축구연맹의 사무총장 볼프강 니어스바흐도 “우리가 이를 불편하게 여길 것이라는 FIFA의 판단이 당혹스럽다. 우리는 개의치 않는다”며 영국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FIFA는 9일 영국팀 선수들이 양귀비 꽃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완장을 차는 것을 허락하기로 했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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