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중앙일보

입력

[줄거리]

열 아홉, 당구장, 철모르고 벌인 싸움,두 친구의 운명이 엇갈린다.

공고를 졸업한 석환과 성빈은 당구장에서 예고생들과 마주친다. 자신들을 비웃는 그들에게 가뜩이나 열등감으로 억눌린 석환은 발끈한다. 성빈은 석환을 말리지만 후배가 피투성이가 된 채 들어온다. 당구장 문이 잠기고 겁없는 10대들 사이에서 벌어진 패싸움.

그러나 싸움을 말리던 성빈이 실수로 현수를 살해한다. 성빈은 살인죄를 뒤집어 쓴 채 7년간 소년원과 감옥을 전전하다 출소한다. 카센타에 취직해서 새 출발을 설계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가족과 사회의 냉대 뿐이다.

친구 석환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경찰이 된 석환은 성빈을 피한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현수의 악령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빈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괴롭힌다. 어느날 카센터에서 만난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훈이 상대 패거리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 것을 보고 성빈은 갈등하다 그를 구한다. 현수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빈은 주먹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태훈은 잠복 중이던 경찰 석환과 마주친다. 지하 주차장에는 단 두 사람 뿐. 둘은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인다. 강력범들과 대치해야 되는 형사. 마찬가지로 잡히지 않도록 넥타이도 매지 못하고 항상 면 티셔츠를 받쳐 입어야 하는 깡패. 두 사람은 각자의 논리와 애환이 있다.

담임 선생님께 찍힌 문제아인 석환의 동생 상환. 그의 하루는 길거리와 오락실에서 삥 뜯기. 거리를 활보하며 싸움하기. 그리고 술마시기. 학교는 갑갑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꿈도 없는 상환.

돈과 여자, 술과 싸움, 그가 꿈꾸던 진정한 남자의 세계. 성환은 성빈을 찾아가 폭력단에 가입시켜 줄 것을 간청하고, 성빈은 당구장 사건을 떠올린다. 그리고 석환에 대한 묘한 감정으로 성환을 자신의 휘하에 둔다. 다른 폭력배와의 싸움이 벌어지는 날, 상환과 몇몇 애숭이들이 희생양으로 동원되고 동생에 대한 사실을 안 석환이 찾아온다. 두 개 의 결투, 석환과 성빈의 기나긴 원한, 그리고 폭력배들의 칼날 앞에 놓인 상환...

[리뷰]...신용호 기자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요모조모 돋보이는 구석이 많다.

우선 돈이 '엄청나게' 조금 들었다. 16㎜, 그것도 남이 쓰다 남은 자투리 필름으로 제작했으니까. 총 1억2천5백만원. 그러나 제작비를 알기 전엔 표가 잘 안 난다. 그러니 충무로 영화인들은 긴장할 만하다. 그 열 배 스무 배를 들이고도 관객들의 반응이 시원찮은 작품이 많으니 말이다.

감독도 별나다. 고졸 학력에 공사장 잡부, 호텔 청소원 등 경험으로 무장했을 뿐 정식 영화 공부는 안 했다. 혼자서 2천 편이 넘는 영화를 본 게 전부다. 잠깐 영화사 연출부에서 일한 적은 있다. 그러나 장편 데뷔작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에서 1인5역을 했다. 기획.각본.연출.주연.무술감독. 다들 놀랍다는 반응이다.

독립영화는 대부분 감독의 자기 표현을 중시한다. 비서술적이고 상업성도 희미하다. 해서 재미와는 담을 쌓기 일쑤다. 이 영화는 4개의 단편영화로 구성됐다. 하지만 전형적인 독립영화와는 거리가 있다.

감상하다 보면 오히려 〈넘버3〉〈주유소 습격사건〉같은 상업영화가 연상되니까. 열등감에 찌든 공고생 석환.성빈의 치기 어린 싸움을 그린 〈패싸움〉 . 감옥에 갔다 온 성빈이 자신이 죽인 악령과 대결하는 〈악몽〉 . 경찰이 된 석환이 폭력배 보스와 한판을 벌이는 〈현대인〉. 석환의 동생이 성빈을 따라 폭력배가 돼 벌이는 조직간 혈전을 그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그 단편들. 각각이 액션.호러.다큐멘터리.갱스터를 넘나든다.

이들은 독립적이지만 연결이 설득력 있고 꼼꼼하다. 해서 단편과 장편을 동시에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곳곳에 매설된 코믹한 장치, 슬로모션과 스피드를 적절히 결합한 액션은 영화의 양념들. 여배우가 거의 나오지 않는 데다 욕이 대사의 절반을 넘는 것도 이 영화가 가진 각별한 구석이다.

실제 욕설을 뱉는 장면은 워낙 사실적이어서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그 수많은 욕설 중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는 말. "x새끼들아, 세상을 졸로 보지마. " 이는 돌파구 없는 세상을 향해 그들이 던지는 공통된 하소연이다.

맨주먹 하나로 아등바등 해보지만 슬픔만 토해내고 꺼꾸러지는 젊은 군상들. 이 영화는 그들을 위한 송가다.

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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