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유럽에서 본 유럽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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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유럽의 위기 덕분(?)에 모처럼 유럽을 돌아보고 있다. 놀랄 정도로 변한 게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우리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퇴보한 느낌이다. 변한 게 있다면 사람들의 표정이다. 전보다 여유가 없어진 것 같다. 왠지 고단하고, 지쳐 보인다. 최근의 경제 위기 탓만은 아닐 것이다.

 태풍의 눈에서는 되레 바람이 잠잠하듯 위기 한복판에서는 오히려 위기를 못 느끼는 법이다. 당장 유럽이 어떻게 될 것처럼 난리지만 막상 와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아직은 평소의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이 사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다. 위기라고 해도 다 견디며 산다. 위기라니까 위기인 줄 아는 것이지 일상의 삶에는 아직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진짜 위기는 위기 다음에 온다.

 밖에서 본 그리스는 이미 망해도 몇 번 망했을 나라다. 국가는 부도 직전인데 공무원들은 월급 깎고, 연금 깎는다고 연일 시위다. 사회는 부패에 찌들어 있다. 위기 앞에서도 정치인들은 제 밥그릇 챙기느라 매일 싸움질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리스인들은 일상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공유하며 열심히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긴축 조치에 항의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아테네 도심의 신타그마 광장은 모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한시적인 과도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여야 영수회담 결과를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다. 기대대로 집권 사회당(PASOK)과 보수 진영의 신민주당(NDP)이 참여하는 중립적 성격의 거국내각이 출범해 유럽연합(EU)의 제2차 구제금융안을 승인하고, 추가 개혁조치를 이행한다면 비록 일시적이지만 그리스는 안정을 되찾을 가능성이 크다. 돌출 행동으로 지탄받았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국민투표 협박 카드가 의외의 성과를 거두는 셈이다. 물론 그걸로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그리스의 전면적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시민운동가 토마스 치메로스(50)는 “그리스 전국에 약 2000명의 ‘봉건영주’가 있다”고 말한다. 정당과 연계돼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호족(豪族) 세력이 중세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기관이나 국영 기업의 일자리를 매개로 ‘고객’을 관리하며 국가재정을 축내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바로 그들이란 것이다. 이들을 일소하지 않는 한 재정 위기는 재발하고, 그리스엔 미래가 없다고 그는 목청을 높였다.

 그는 직접 ‘디물기아 크사나(재창조)’란 이름의 정당을 만들어 내년 2월 19일 총선에 참여할 예정이다. 지식인을 중심으로 이미 1만여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 인터넷을 통해 후원금 내역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것이 정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시민들의 절박한 심정이 표로 연결됐을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민주화보다 어려운 것이 정치개혁이다.

 그리스의 국가부도, 즉 디폴트(채무불이행)와 유로존 퇴출은 결국 시간 문제라는 것이 유럽의 지배적 시각이다. 질서 있는 디폴트냐, 무질서한 디폴트냐의 문제만 남았다는 게 이곳에서 만나 본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그리스 경제가 EU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하다. 질서 있는 디폴트만 전제된다면 유로존이 입는 피해는 생각만큼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국가부도는 드문 일이 아니다. 1824~2004년 사이에 모두 257건의 디폴트가 있었다. 연평균 1.5회꼴이다. 문제는 디폴트 자체보다 전염 효과다. 현재 유로존 국가들이 시장과 싸우고 있는 것도 전염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스 국가 채무의 50%를 탕감하고, 1000억 유로를 추가 지원하고,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규모를 4400억 유로에서 1조 유로로 늘리기로 한 것도 방화벽을 쌓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그리스가 질서 있는 디폴트를 하게 되면 불길이 이탈리아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유로존에서 세 번째 경제 규모를 가진 이탈리아의 디폴트는 2007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촉발시킨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과는 비교가 안 될 파괴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유로화의 신용도가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는 엄청난 충격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자리를 지키는 한 이탈리아에 대한 신뢰 회복은 어렵다고 보고 유로존 국가들은 일제히 그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파판드레우에 이어 베를루스코니가 다음 제물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극장에서 누가 “불이야”라고 외치면 모두 출구로 몰려가기 때문에 피해는 더 커진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이미 경험한 일이다. 학자들은 면피를 위해, 언론은 눈길을 끌기 위해 위기 경보를 마구 울려대는 형국이다. 그럴수록 위기는 더욱 증폭된다. 유럽이 지금 처해 있는 딜레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아테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