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정치는 운동시합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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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

응원 열기로 가득 찬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스릴과 환희와 절망이 뒤범벅된 흥분의 도가니였다. 경기는 경쟁의 장에서 이기려는 게임이다. 경쟁자의 수를 읽고 무너뜨려야 내가 산다. 투수는 낙차 큰 커브 볼을 던져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어야 한다.

 정치도 반대 당을 이겨야 한다. 그러나 정치를 운동 경기하듯 싸워서 이기려고만 드니 나라는 어지럽고 유권자는 실망한다. 빈자와 부자의 틈은 줄어들지 않고 세대 간 갈등은 더 치열해진다. 지방 색이 지워지지 않는 것도 여전하다.

 지도자들은 그동안 물질과 에너지를 생산하면 국민이 만족할 것이라는 지배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19세기 과학주의와 도구적 합리주의에 빠져 허위의 형평을 좇으며 목적이 절차를 정당화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불의를 외치며 범법을 해도 자기정당화가 되었다. 그것이 결국 나쁜 권력이 돼 남을 괴롭히고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도 모르고 나만 옳다고 우겼다. 상대방을 부정해야 내가 존재하니 그것은 결국 얻은 것만큼 잃은 경기였다. 자연은 파괴되고 인성은 매몰돼 사람 사는 동네 같지 않게 돼가는데도 정치 지도자들은 무상으로 급식을 하면, 반값으로 대학 등록금을 낮추면, 청년 일자리를 늘리면…하면서 유권자를 유혹했다. 정책을 잘만 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는 배운 사람이 더하다. 세포가 아니라 세포군이어야 유전자를 바꿀 수 있는데, 논리가 다른 정책을 각각 붙잡고 문제가 풀릴 것이라며 덤빈다.

 시대 따라 세상을 버티는 원리는 변한다. 경쟁의 산업화 원리가 기승을 부릴 때가 있었다. 평등만이 살길이라며 민주화의 물결이 봇물처럼 밀려들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는 공존하겠다는 열망으로 무엇보다 생명체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정치를 해야 하는데 정치 지도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너나없이 생명체에는 (1)내적 존재의 세계 (2)가치의 세계 (3)의미의 세계 (4)느낌의 세계가 있게 마련이고 이들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내 세계에 충실할 뿐 남의 존재, 가치, 의미, 느낌 등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을 모르는 것은 물론 내 세계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잘 모르고 경쟁자를 탓하고 내 편만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한다. 합리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이분법의 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도자라면 나의 내면 세계부터 천착하며 과연 내 생각대로 고치자는 것이 옳은지, 나는 이를 해낼 수 있는지 의심부터 해야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젊은 지도자일수록 자신이 마치 구세주인 양 떠들며 군중을 우민화한다. 이들은 대개 머리가 우수한 천재에 가까운 인물들이지만 실은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카너먼의 말대로 인간이 결코 합리적일 수 없고 편견 덩어리며 착각하기 일쑤인데도, 자신은 세상을 구원하는 사도 행세를 한다. 이들은 실재가 뭔지를 잘 모른다. 이 세상에 실재를 제대로 보고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스티븐 호킹의 말대로 언어와 논리로 모델을 만들어 실재인 양 호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정의나 민주주의를 만져보지도 냄새 맡지도 못했지 않은가. 천재를 편재(偏才)라고 두려워한 지셴린(季羨林)의 말을 상기하면 세상을 구원하는 진정한 지도자가 필요한지, 문제를 부각시키기에 급급한 창도가(advocator)가 옳은지가 가려진다.

 21세기는 공생하는 자본주의 4.0 시대다. 기업들도 경쟁사 부품을 쓰며 상생하듯, 기성 정치인들이나 창도가들은 경기장에 나앉았다고 착각하지 말고 피터 버거의 말대로 자신부터 의심하는 믿음으로 상대방과 공존하는 리더십을 실천해야 나라가 하나 되고 모두가 편해진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