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선 소장의 한국 자동차 비사 秘史 ⑧ 한국 최초의 자동차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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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최초의 인명 사고를 일으켰던 이완용의 자가용. 이완용의 아들과 사위가 일곱 살 사내 아이를 친 사고였다.

“어머나, 성님. 이것 좀 봐요. 글쎄 이완용 대신의 아들이 기생을 태우고 자동차 놀이를 나가다가 일곱 살 사내 아이를 치어 다리를 절단 냈다고 신문에 났구먼요.”

 “뭐, 어디 좀 보세나. 저런, 그 자동차란 것이 기어이 사람을 치어 큰 탈을 냈구먼.”

 “저런 우라질 놈 봤나. 제 아비가 나라를 팔아먹더니 그 아비에 그 자식이구먼.”

 “누가 아니래나. 고급 관리라는 놈들이 나랏일은 제쳐 놓고, 제 아비 권세 업고 자동차 놀이에 기생질이라니. 어린 아이만 불쌍하게 됐구먼. 속 터져.”

 1912년부터 서울 장안에 나타난 자동차 때문에 희비애락이 하나둘 생겨났다. 당시 불과 한 대밖에 없던 택시가 1년 뒤인 13년에는 다섯 대로 늘어났고, 주지육림에 빠진 세도가 집안 자식들이 자동차 호강에 정신을 못 차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타고 서울 장안 한 바퀴를 도는데 쌀 반 가마니가 날아가는 판이었다. 돈이 있어도 자동차가 귀해 차 한 번 타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서 아예 예약을 해둬야 타볼 수 있었다. 당시 자동차 주가(株價)는 금값보다 높았다. 이래서 을지로 입구에 있던 일본 업자 곤도의 자동차부에는 밤낮없이 전화통에 불이 났다.

 아비의 세도와 부의 힘을 등에 업고 놀아나던 도령들은 요릿집에서 기생을 끼고 놀았다. 심심하면 차를 불러 타고 동대문 밖 영도사 절이나 청량리 쪽 홍릉, 아니면 장춘단 공원으로 드라이브하는 망국의 풍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근일 자동차가 나타난 이 후로 할 일 없는 부랑 탕아들이 자동차를 큰 호기로 알고 기생과 창녀들을 태우고 성문 안팎으로 먼지 날리며 돌아다니는데…(중략) 이항구와 홍운표가 동소문 밖으로 자동차를 타고 나가다가 인창면에 사는 정진협씨의 일곱 살 된 아들의 다리를 부상하여…’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장안 백성들은 놀랐다.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의 아들이며 왕실의 고급관리인 이항구와 역시 이완용의 사위로 경무청(경찰국) 총순(경위)으로 거들먹거리던 홍운표가 어울려 요정에서 흥청거렸다. 그러곤 아비의 자가용을 타고 기생들과 놀러나가다가 일으킨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인명 사고였다. 망국의 풍조를 탓하던 신문도 자동차가 이 땅에 처음 등장하자마자 일으킨 사고를 보도하며 아연실색했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당대 최고 세도가 이완용의 아들과 사위 아닌가. 막 피어나는 어린 자식의 다리를 망쳐 놓아도 감히 달려들어 손해배상 청구도 할 수 없었던 가난한 농부 정씨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땅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자동차 보험이란 단어조차 모르던 시절이니 정씨는 고스란히 당하기만 했다. 이 땅에서 자동차가 낸 최초의 인명 사고에 백성들도 울분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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