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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화요칸중궈(看中國)] 리커창, 사석에선 후진타오와 형·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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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커창 중국 국무원 상무부총리(왼쪽)가 23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최영림 내각총리를 만나고 있다. 23일 북한을 찾은 리부총리는 25일 베이징으로 복귀했다가 26∼27일 한국을 방문한다. [평양 신화통신=연합뉴스]

리커창(李克强) 중국 상무부총리가 내일 한국에 온다. 차기 총리로 유력시돼 더 큰 관심을 끈다. 그는 중국 경제학 박사(베이징대학)다. 학부에선 법학을 공부했다. 최고 지도자(후진타오 국가주석)의 강력한 지지도 얻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총리 스펙’이다. 그러나 ‘박사 총리’ 리커창의 어깨는 무겁다. 그의 정책 선택 여하에 따라 10년 후 중국 경제는 미국을 추월할 수도 있고, 아니면 초라한 대국으로 주저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다. 오늘의 리커창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를 만든 ‘7인의 멘토’를 만나본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리커창은 성장 과정에서 여러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인생 멘토’가 돼 리커창의 정치철학을 형성한다. 첫 스승은 안후이성의 국학대사(大師) 리청(李誠)이었다. 리커창이 11살 때였던 1966년,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에 휩쓸리게 된다. 학교는 홍위병 세상이 됐고, 수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리커창의 부친 리펑산(李奉山)은 아들을 안후이성 문사관(文史館)에서 일하고 있던 리청에게 데리고 갔다. 중국 고전을 공부시킬 요량이었다. 한눈에 리커창의 비범함을 알아본 리청은 기꺼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리커창은 국학대사의 지도를 받아가며 『사기』 『한서(漢書)』 『자치통감』 등 역사서를 섭렵했다. 『소명문선(昭明文選)』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 등의 수필집을 통째로 외웠다. 매일 오후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5년을 배웠다.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바탕은 이때 형성됐다. 그는 지금도 타인과의 대화와 연설 등에서 자주 고전을 인용한다.

 두 번째로 만난 스승은 헌법·행정법의 대가인 궁샹루이(?祥瑞) 교수다. 청년 리커창은 78년 3월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한다. 문혁이 끝난 후 부활된 첫 대학 입시에서 최고 명문 베이징대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베이징대 법학과를 이끌던 사람이 바로 동서양의 헌법을 꿰뚫고 있던 법학자 궁샹루이 교수였다. 리커창은 궁 교수의 애(愛)제자가 됐고, 그의 지도하에 앨프레드 데닝의 명저 『정당한 법의 절차』를 번역하기도 했다. 군중(群衆)출판사가 출판한 이 책은 지금도 시중에서 팔릴 정도로 널리 읽히고 있다. 리커창은 “어학자 지센린(季羨林) 교수에게서 공부 방법을 배웠다면 궁샹루이 교수에게서는 ‘헌법 정신’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그가 향후 법치(法治)를 강조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오늘의 리커창을 만든 세 번째 멘토는 마스장(馬石江) 베이징대학 당 부서기다. 리커창은 82년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이런 그를 국내에 잡아둔 사람이 바로 마 부서기였다. 그는 “국내에 남아 국가에 공헌하라”며 10여 차례나 그를 불러 권한 것으로 알려진다. 리커창은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로 일하게 된다. 그의 정치적 역정이 시작된 것이다. 리커창은 대학 시절 자유주의에 심취한 대학생이었다. 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반체제 인사가 된 왕쥔타오(王軍濤)·후핑(胡平) 등이 그의 ‘절친’이었다. 그러나 공청단 서기로 일하게 되면서 이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됐다. 마 부서기가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리커창은 대학원 시절 두 명의 경제학 대가를 만난다. 자유주의 경제학을 이끌어 온 주류 경제학자인 샤오줘지(蕭灼基)와 리이닝(?以寧) 교수가 그들이다. 법학을 전공했던 리커창은 대학원에서 경제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농촌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88년 『농촌공업화:구조전환의 선택』이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썼다. 샤오줘지 교수가 지도교수였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는 리이닝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가 91년 발표한 논문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는 중국 경제학계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경제과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들 두 경제학자를 통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학적 지식도 갖추게 된 것이다.

 그의 경제학적 지식은 허난(河南)성과 랴오닝(遼寧)성 당서기 시절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전통적인 농업성(省)이었던 허난을 공업성으로 탈바꿈시켰다. 농촌공업화를 주제로 했던 그의 석사 논문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랴오닝성에서는 국유기업 개혁에 적극 나섰다. 대형 기업의 지분 구조조정을 통해 국유기업 경영에 민간의 참여도를 높였다.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던 샤오줘지와 리이닝 교수에게서 ‘시장의 힘’을 배웠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리커창은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로 근무하던 83년 인생의 여섯 번째 멘토를 만나게 된다. 당시 당 중앙조직부 부부장이었던 왕자오화(王照華)가 주인공이다. 82년 공청단 베이징시 지부는 중앙 공청단으로 승진할 대표를 뽑았다. 베이징대학 서기였던 리커창 역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선했다. 시지부 고위 인사들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토론을 요구하고 나서는 리커창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격이었다. 이때 왕자오화 부부장이 개입해 리커창을 대표로 뽑았다. 왕자오화가 위기에 처한 젊은 리커창을 구한 것이다.

 리커창이 평생의 정치 멘토인 후진타오를 만난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당시 후진타오는 공청단에서 중앙서기처 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공청단 분위기는 후야오방이 건설한 평등정신·이상주의가 충만했다. 둘은 ‘진타오’ ‘커창’ 등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해졌고, 평생의 정치 선후배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리커창은 약 7년 동안 후진타오를 상관으로 모셨다. 그들은 지금도 사석에서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진타오의 후광을 업은 리커창은 승승장구했다. 93년 5월 최연소(38세)로 부장(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됐다.

 83년 리커창은 신인을 한 명 후진타오에게 소개했으니, 그가 바로 후춘화(胡春華) 네이멍구 당서기다. 후진타오-리커창-후춘화로 이어지는 ‘공청단 세습 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3인의 공청단 세습인은 온건하지만 노련하고, 진보적이지만 너그럽고, 신사적이지만 실사구시하는 성향도 비슷하다는 평가다.

한우덕 기자·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공청단(共靑團·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은 공산당의 청소년 조직이다.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발족됐으며, 단원은 현재 약 76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가입 대상은 14~28세다. 공청단은 현재 중국 권력의 핵심이다. 정점에 후진타오 주석이 있고,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리커창, 2022년 출범할 제6세대 권력의 선두 주자로 꼽히는 후춘화(胡春華) 네이멍구(內蒙古) 당서기 등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리커창 약력

●1955. 7. 안후이성 허페이 출생

●1978. 3. 베이징대 법학과 입학

●1982~83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

●1983~85 공청단 중앙학교 부부장

●1985~93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1993~98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1988~94 베이징대 경제학 석·박사)

●1998~99 허난성 대리 성장

●1999~2002 허난성 성장

●2002~2004 허난성 당서기, 성장

●2004~2007 랴오닝성 당서기

●2008.3~ 국무원 상무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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