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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9) 후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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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신성일·김진아 주연의 영화 ‘지금 이대로가 좋아’(1984). 신성일이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어려운 시절 촬영한 작품이다. [중앙포토]

11대 국회의원 선거 패배로 그간 쌓아온 모든 게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선거 다음 날인 1981년 3월 26일자로 돌아온 당좌수표를 막을 길이 없었다. 부도를 냈다. 충무로에는 급전을 빌려주고, 3부에서 3부 5리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자가 몇 있었다. 그 중 가장 막강한 사람은 ‘뱀대가리’였다. 그의 돈을 선거자금으로 빌렸다. 그가 나를 세운상가 1층 풍전호텔로 불러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곳이었다. 그가 날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사기꾼아, 내 돈 왜 안 주는 거야.”

 그 전까지 내가 늘 “형”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내가 낙선하자 돌변한 것이다. 나는 탁자를 탁 때리면서 일어났다.

 “야, 내가 네 돈 받아서 술 쳐먹었어? 도박을 했어? 내가 사기친 게 뭐 있어? 나는 영화 제작했고, 선거 치르다가 돈이 없을 뿐이야. 그 돈은 갚으면 될 것 아냐?”

 나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기세 싸움에서 눌린 뱀대가리는 테이블 밑으로 쏙 들어갔다. 고리대금업자는 얼굴이 드러나면 큰일이다. 그가 테이블 밑에서 손짓했다.

 “신 감독, 앉아. 앉으라고.”

 그러더니 슬금슬금 피하며 사라졌다. 이 사건은 충무로에서 화제가 됐다. 그 때 나는 배우협회장으로 있었다. ‘뱀대가리가 신성일한테 돈을 못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리대금업자가 돈을 못 받았으니 톡톡히 망신을 당한 셈이다. 얼마 후 그가 ‘무슨 소리냐. 나는 신성일 돈 다 받았다’고 퍼트린 소문이 내 귀에도 들어왔다. 자신이 나를 찾아오지 못하고 심부름 하는 이영식을 보냈다.

 “신 감독, 우리 오야붕 돈 어떻게 됐어? 갚아야 될 거 아니오?”

 나는 눈도 깜짝 안 했다.

 “야, 너 말 못 들었어? 네 오야붕이 신성일 돈 다 받았다고 충무로에 소문 났던데?”

 이영식은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끽소리도 못하고 돌아간 그가 며칠 후 다시 찾아와 통사정했다.

 “신 감독, 우리 오야붕 좀 살려주라. 그러지 말고 반만 갚아줘.”

 우리는 뱀대가리의 빚 1500만원 중 750만원을 갚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내가 부도를 냈기 때문에 빚쟁이들은 나를 형사 고발할 수 있었다. 구속시킨 후 돈을 받아낼 작정이라면 그리 할 수도 있다. 다행히 형사고발까지 한 사람은 없었다. 엄앵란도 말 못할 수모를 겪었다. 하루는 빚쟁이 네 명이 동부이촌동 우리 집(현대APT 32동 1501호)에 몰려와 채무지불각서를 쓰라며 협박했다. 당시 나는 그 곳에 없었다. 여인 혼자서 거친 빚쟁이들을 상대하려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내의 말에 근거해 그 날 상황을 옮겨본다. 엄앵란은 네 명의 빚쟁이와 마주앉아 담담하게 말했다.

 “이렇게 하시면, 간단해요. 여러분 보는 앞에서 여기 1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면 되요.”

 네 명 중 가장 나이 많은 노인네가 그 말을 다 들은 후 입을 열었다. “야, 가자. 이 사람도 시간을 줘야 돈을 벌 것 아닌가. 엄 여사는 이런 사람 아닌 것 알아. 힘 내소.”

 그는 격려를 해주며 일행을 끌고 갔다고 한다. 이 때까지 박수 받고 살던 우리 부부였다. 아침에 눈만 뜨면 빚쟁이와 마주하게 됐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었다. 내 명예의 추락이자 가장으로서 면목 없는 일이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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