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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5) 식당 개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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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성일의 아내 엄앵란이 1976년 가수 전영록과 함께 영화 ‘짝’에서 열연하고 있다. 엄앵란은 3년
후 대구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식당 ‘나드리’를 열었다. [중앙포토]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선거를 계기로 내 마음 속에 씨앗이 하나 자랐다. 정치에 대한 열망이었다. 영화계는 무너지고 있었고, 75년 이후로는 출연작이 1년에 몇 편으로 확 줄었다. 나는 40대 초반이고, 젊었다. 고향 대구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아보겠다는 야심이 싹텄다.

 20년 가까이 고향을 떠나있다 보니 얼굴을 아는 친구가 몇 명에 불과했다. ‘친구들도 몰라본다’고 뒤에서 욕을 먹기도 했다. 고향 친구들과 낯을 익히고, 가까이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사람 끌어 모으는 것은 식당이 최고다.

 79년 어느 날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초등학교부터 경북고까지 동기였던 이장환이 대구 중심지 향촌동에 백화점을 짓는데 거기서 레스토랑을 해보라고 했다. 3년쯤 대구에서 음식점을 하면서 텃밭을 다지면 11대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당시 나훈아와 김지미가 대전에서 ‘초정’이라는 식당을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었다. 김지미는 JP(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가 초대하는 가족모임에 함께했으나, 76년 나훈아와 결혼하면서 한동안 우리와 멀어져 있었다. 어느 날 박 여사가 “이제 김지미·나훈아 내외도 같이 보자”고 권유했고, 김지미 부부가 박 여사 집안잔치에 함께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들 부부를 인정한 셈이 됐다.

 나와 엄앵란은 79년 늦여름 대구 내려가는 길에 대전 초정식당에 들러보았다. 한창 김치를 다듬고 있던 김지미는 나훈아에게 “여보, 김장 하니까 손님 접대 좀 하세요”라고 말했다. 우리 부부와 나훈아, 셋이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식당을 해볼까 고민하고 있다고 했더니, 나훈아는 “한 번 해보세요. 저희들도 잘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무렵 엄앵란은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커피숍을 해보라는 제안을 대농의 박영일 사장 측으로부터 받았다. 나는 아내가 커피숍을 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훈아의 권유를 받은 후 마음이 식당 쪽으로 기울었다. 미도파백화점에 커피숍을 냈더라면 큰 돈을 벌었을 것이다. 나는 아내를 설득해 개업을 준비했다. 이태원의 태평극장을 팔아서 7500만원을 마련하고, 그 돈을 몽땅 식당에 쏟아 부었다.

 79년 초가을 엄앵란이 앞치마를 두른 식당 ‘나드리예’가 대구 향촌동 대보백화점 2층에 문을 열었다. 나드리예는 ‘나들이 가입시다예’라는 대구 사투리의 느낌을 살린 귀엽고, 곰상스러운 이름이었다. 대구 중구청에 옥호로 신청했더니, 구청에서 우리 말이 아니라며 ‘예’를 빼라고 지시했다. 결국 ‘나드리’로 신청했다.

 하길종 감독이 지어준 영어 이름 ‘Nadriye’로 660㎡(건평 200평) 규모의 식당을 열었다. 식당 앰블럼은 만화가 고우영에게 의뢰했다. 70년대 초·중반 일간스포츠에서 ‘임꺽정’ ‘수호지’ ‘삼국지’ 등을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맞은 고우영은 처녀·총각이 손잡고 나들이 가는 그림을 흔쾌히 그려주었다. 참 재치 있는 그림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게 못내 아쉽다.

 식당은 제법 잘 됐다. 3년 후 국회의원이 된다는 계획이 실현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해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다.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난 심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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