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문화의 근원, 몸을 바꾸자!

중앙일보

입력

몸을 바꾸다니! 난 데 없이 이게 무슨 소리일까? 며칠 전에 친구에게서 받은 책을 마저 읽었습니다. 그 책은〈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는 화장품 광고 카피 같은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또 '배수아의 아름다운 몸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그 책을 쓴 사람이 바로 소설가 배수아입니다. 그 책을 준 친구도 바로 그 사람이죠. 저자에게서 '헌사'가 붙은 책을 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 저자와 저는 같은 연배이고, 일산 신도시 이웃에 살았으며, 소설가 윤대녕과 함께 자주 어울릴 만큼 친한 동료입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그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21세기의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줄 문학을 들라면 기꺼이 그의 것을 예로 들 정도로.

그래서 건네 받은 그 책을 천천히 한 꼭지씩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 글들은 애초에는 한 스포츠 신문에 '컬트칼럼'이라는 제목을 달고 정기적으로 나갔던 것들이죠. 그래서 특별히 체계는 없습니다. 그리고 굳이 적자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또 반드시 몸에 대한 이야기만도 아니죠.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활동한 미국 사진가 만 레이의 사진이 중간 중간을 장식하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몸에 가깝죠. 사실 이 책은 오늘날과 같이 '미탤릭 metalic'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 관계, 라이프 스타일 등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학문적 시각에서 보자면 엉성한 구석이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안에 작가의 예리한 문학적 직관이 비수처럼 번득이고 있어 반드시 엉성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문장, 조금은 부적절한 단어 사용, 또 촘촘하지 못한 논리적 비약.

하지만 오히려 그런 엉성한 면이 매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학자가 아니고 작가이며, 작가의 자유란 학자의 엄격성 못지 않게 끝까지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정말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꽉 짜여져 있지 않은 어딘가 혼돈스럽고 불완전한 우리들의 존재와 생입니다.

그런 점을 전제로 하고 한 가지를 지적하겠습니다. 사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몸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몸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나가려고 한 기록에 가깝습니다. 몸이 지나치게 욕망의 대상, 혹은 주체로만 생각되는 우리 사회에서 사실 몸에 대해 직접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죠. 기껏해야 서갑숙의 체험담이나, 'O양의 비디오' 정도 수준에 멈춰 있는 우리 시대의 몸에 대한 불쌍한 인식.

그런 상황에서 여자의 신분으로 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집을 투명한 창유리로 바꿔놓고 만인의 시선 앞에 개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잘못하면 '쇼걸'이 될 운명에 처하게 될 테니까요. 친구는 현명하게도 그런 위험을 잘 피해나갔습니다. 그 책으로 서갑숙씨처럼 유명해지지도, 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현명했던 것이죠. 그래서 읽는 내내 웃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함정을 피해나가는 모습이 좋았으니까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몸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몸은 단순히 끈적거리는 욕망의 대상이나 주체만은 아니죠. 몸은 더 나아가 문명과 문화의 근원입니다. 월간 〈art〉 2000년 4월호에서 연세대학교 신방과의 김주환 선생은, "모든 문화적·사회적 활동의 근원이 몸이며, 우리가 창조하는 모든 문화적 생산물과 문명 전반에 몸은 투영되어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집, 컴퓨터, 키보드, 의자, 자동차 등등 모든 것이 우리의 몸을 따라 고안되고 변화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조금만 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타인은 타인의 몸으로 내 앞에 나타나며 나는 나의 몸으로 타인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이 세상에 관여하며 세상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에 정화열은 몸이 곧 사회성의 기반이라 하고 있다. 몸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전제조건이며, 커뮤니케이션은 마음과 마음 사이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몸과 몸 사이의 문제다."

그의 견해가 반드시 보편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이 시각에 동의합니다. 몸은 우리의 일상과 존재에 아주 깊숙이, 너무나 분명해서 인식되지 못할 정도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몸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나의 몸처럼 타인의 몸까지도.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이니까요.

제가 젊은 날을 보낸 80년대는 '의식화'의 시대였습니다. 정신을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던 때였죠.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속속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386세대'의 이름을 걸고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5·18 전야에 광주의 어느 술집에서 취흥에 빠진 바람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총선 내내 스타가 되었던 한 시민운동가가 성추행 혐의로 고발당하며 우리에게 충격을 준 일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 '의식화의 시대'를 모범적으로 살아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의식화가 결국 몸을 이기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겹도록 누누이 들어온 '지행합일'의 어려움도 바로 의식과 몸 사이의 지체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죠. 맑스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도 저는 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고 봅니다. 이타(利他)성의 전형인 공산주의적 인간형의 숭고한 정신이, 편하고자 하는,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몸을 이기지 못한 것이죠.

의식을 바꾸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각성'의 순간, 깨지는 어떤 순간 우리의 의식은 획 바뀝니다. 그것은 그만큼 의식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몸은 아주 보수적입니다. 근육 하나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오랜 시간을 들여 운동을 해야하죠. 조금만 게으르면 또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성인이 되도록 성장을 하고 나면, 비슷한 키에 비슷한 모양과 비슷한 능력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정신-의식은 좋은 책 몇 권, 좋은 말 몇 마디, 좋은 사람과의 만남 등등의 외적인 도움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만큼은 오로지 자기자신에 의해서만 변할 수 있습니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몸은 절대로 변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깊고, 은근하며, 음험하기까지 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몸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몸을 바꾸기 위해 우선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훈련부터 해야할 것 같습니다. 386세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전(前)총선시민연대 대변인이 자신의 몸을 사랑할 줄 알았다면 그런 실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선 누리고자 하는, 취(取)하고자 하는 욕망에 굴복함으로써 타인의 몸을 사랑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바로 자신이 타인이 되는 순간 자아훼손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결국 자신의 몸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늘 행복과 평안을 꿈꿉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가꾸어야겠죠. 그런데 그 몸은 늘 타인의 몸과 함께 부딪치고 섞입니다. 그러니 타인의 몸도 사랑해야 하겠죠. 내가 그 사랑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결국 내 몸에 대한 사랑은 타인의 몸에 대한 사랑이고, 타인의 몸에 대한 존중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존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소통하며 아끼는 몸의 문화를 만든다면 좀 더 멋진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인지 제 친구의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 맨 앞에 나온 사진이 의미심장합니다. 바닥에 앉아 몸을 앞으로 구부린 상태에서 손을 뒤로 뻗어 엉덩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뒤에서 카메라로 클로즈-업한 그 사진은 우선은 몸의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아름다운 몸에 대해 여전히 억압을 가하고 있는 우리시대, 우리사회에 대한 항의와 조롱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사진 밑에만 만 레이의 사진이라는 출전이 나와있지 않네요. 혹시 저자 자신의 사진이 아닐까? 자세히 보면 그 손이 제 친구의 그것 같기도 합니다. 서양 여자의 손은 대개 그렇게 생기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물어볼 이유 없는 이런 생각일랑 떨쳐버리고 생기 가득한 자연 속으로 뛰어가 조깅이라도 해야겠습니다. 저는 몸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고로 저는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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