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이 물려준 나눔 DNA … 기부할수록 능력 더 생기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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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호 12면

이달 6일 경기도 부천 가톨릭대 성심교정에서 버나드 원길 리 국제포럼이 열렸다. 왼쪽부터 박영식 가톨릭대 총장, 이원길씨의 첫째 아들인 이덕선 회장, 다섯째 이덕효 신부, 막내인 여섯째 이덕형 회장. 맨 왼쪽에 이원길씨의 부조상이 보인다. 최정동 기자

“이 가족의 삶이 곧 인본주의 그 자체다.”
가톨릭대 총장인 박영식 신부는 이달 6일 ‘제1회 버나드(베르나르도) 원길 리 국제포럼’이 열린 경기도 부천의 성심교정에서 2001년 세상을 떠난 이원길씨의 가족을 이렇게 소개했다. 재미동포 사업가인 큰아들 이덕선(72) 얼라이드테크놀로지그룹(ATG) 회장과 막내아들 이덕형(52) 글로텍 회장은 2년 전 가톨릭대에 150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서 서로 존중하는 공동체 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국제 학술대회를 매년 열기로 했다. 형제는 올해 처음으로 열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150만 달러를 추가로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가톨릭대에 300만 달러 기부한 이덕선·덕형 형제

이덕선 회장은 “선친은 약주를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의 형편이 어려운데 당신만 호의호식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평생 좋은 음식, 좋은 술을 멀리했다”고 회고했다. 1917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이원길씨는 일제시대 연백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베풀고 나누는 삶을 실천했다. 6대째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이어 온 그는 마을에 강당과 축구장을 짓고 방학 때면 귀향한 대학생들을 불러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가르쳤다. 덕분에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도 이념에 따라 주민들이 갈라져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해도가 북한 땅으로 굳어지면서 고향을 등지고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정착한 뒤 자신도 피란민이면서 구호물자인 옥수수 가루와 우유로 강냉이죽을 쒀 다른 피란민들에게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하루 1000명분의 식사를 만드느라 손금이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삶은 아들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 회장은 1966년 구호물자를 싣고 온 화물선을 얻어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운 그는 89년 네트워크 시스템 업체를 차렸다. 현재 ATG는 직원 600명, 연 매출액 8000만 달러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은 가톨릭대에 기부한 것 외에 미국에서도 300만 달러를 기부해 워싱턴 근교에 노인요양시설을 겸한 수녀원을 지었다. 그는 “기부를 하면서 가끔은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 때도 있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항상 하나를 기부하면 다음에는 더 많이 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더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나눔의 철학’은 최근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선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일맥상통한다. 이 회장은 “세금 내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형편이 좋다는 얘기니 그만큼 즐겁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다. 그는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속도 위반으로 벌금을 내도 돈 있는 내가 사회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즐겁다”며 웃었다. 그의 좌우명은 ‘항상 옳은 일을 하라(Always do the right thing)’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직’이다. 그는 “거짓말을 하면 늘 기억하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며 “정직하다면 지난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이 늘 자신의 길만 가면 되니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동생인 이덕형 회장은 95년 형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뒤 글로텍을 창업해 직원 250명, 연 매출 4500만 달러 규모로 키웠다. 모교인 한국외국어대에 130만 달러를 기부했고 올 6월에는 서울성모병원에 어린이심장병 수술비에 써 달라며 50만 달러를 쾌척했다. 박 총장은 “이덕형 회장이 올해 결혼 25주년을 기념해 부부 동반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워싱턴에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오는 항공편을 타고 오더라”는 일화를 들려줬다. 한국에 입고 온 정장도 아웃렛에서 장만한 300달러짜리다. 성공한 사업가지만 이런 식으로 일신의 편안함을 포기해 모은 돈으로 매년 어린이 7~10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값진 기부를 한 것이다.

가톨릭대가 기부금으로 선친을 기리는 인본주의 국제포럼을 열기로 결정한 데 대해 두 형제는 기꺼이 찬성했다. 미국에서는 ‘월가를 점령하자’는 시위가 일어나고 한국에서는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고공 농성이 몇 달째 이어지는 등 사회 갈등이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지식보다 인성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이들의 다섯째 형제인 바오로 이덕효 신부는 “모든 사람은 개성이 있고 유일한 존재로 존중받아야 마땅한데 모두가 1등을 하고, 일류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해야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낙오자라고 여기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사제가 된 이 신부는 워싱턴DC 에피파니성당에서 주임으로 봉직하고 있다.

이덕형 회장은 “돈을 버는 방법, 다른 사람을 딛고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만 가르치는 교육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돈을 벌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그때 어떻게 써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덕선 회장은 “국제포럼을 통해 학술적인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베풀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의 좋은 지도자만 나와도 수천, 수만 명이 혜택을 보게 된다”며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한국의 사회적 갈등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데 가슴 아파했다. 이 신부는 “좌파다 우파다 하면서 상대방을 적으로 몰아붙이는 건 정말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다 같은 한국사람인데, 조금의 연대감도 없이 가차없이 공격해 희생양을 만들고야마는 풍토가 문제라고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TV 드라마만 봐도 앙심을 품고 복수에 나서는 얘기가 넘쳐난다”며 “서로 소리 지르고 표현 자체도 극렬한 쪽으로만 고르는 현실을 반영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표현의 자유가 크게 신장됐지만, 그렇다고 인신공격의 자유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조금씩 양보해 서로 위하고 존경하는 인본주의를 강조한다. 이 신부는 “가톨릭이기 때문에 인본주의를 되찾자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되살리자는 것”이라며 “좋은 것은 불교에서 왔건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이든 구별할 필요 없이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톨릭대는 국제포럼 행사를 계기로 인본주의와 공동체 교육을 강조할 예정이다. 가톨릭은 과거 한국 사회에서 근대화와 민주화 과정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앞으로는 세대 간 또는 계층 간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박 총장은 “1등과 꼴찌, 잘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 부자와 가난한 사람, 남녀노소를 나누지 않고 함께하는 대학,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람 냄새 나는 대학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입시에서도 봉사, 타인에 대한 배려, 사회에 대한 기여 의지 등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했다. 박 총장은 “지난 몇 년간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선발한 재학생들을 모니터링한 결과 정시입학생들보다 더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며 “인성과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인재를 키워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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