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때로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밤에 술먹는 버릇이 도졌습니다. 내 우울증은 마치 길게 생리통을 앓는 여자의 그것처럼 주기적으로 찾아옵니다. 이 며칠 바람이 유난히 드세게 불어갑니다.

바다엔 배가 뜨지 못하고 한밤에 맨발로 베란다에 나가 서 있으면 마을 전체가 깊게 등을 도사리고 있고 전봇대에 달린 귤빛 가로등만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10시. 주인 내외는 초저녁부터 잠들어 있습니다. 발소리를 죽여 밖으로 나갑니다. 훔쳐가듯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겁니다. 술을 사려면 성산까지 나가야 합니다. 검은 돌담들을 돌아 배추밭과 감자밭을 지납니다. 바람 속에서 흰 감자꽃들이 모가지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감자밭을 지나면 긴 갈대밭이 나옵니다. 마른 대궁들 사이로 올봄의 새 잎들이 푸른 안개처럼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대가 우거진 길로 누군가 힘겹게 앞서 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상처입고 바람 속을 쫓겨가는 커다란 개로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하이빔을 켭니다. 그 바람에 짐승은 놀라 마구 뛰어가기 시작합니다.

아뿔싸! 그것은 새끼 말이었습니다. 내가 놀라게 한 것입니다.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갔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놀란 망아지는 급기야 갈대숲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그 밤에 문을 여는 곳은 성산 킹마트밖에는 없습니다. 맥주 몇 병을 사들고 나오다 시커멓게 버티고 서 있는 일출봉을 올려다봅니다. 장엄합니다. 그동안 여덟 번쯤 제주에 올 때마다 나는 일출봉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한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출봉은 내가 올 때만 바다에서 불쑥 솟아올라와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밤이건 낮이건 또 성산 어디를 가든 일출봉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눈에 덜컥덜컥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는 오직 한 각도에서만 고정관념으로 일출봉을 봐 왔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물들이 실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내친 김에 일출봉 매표소 안으로 들어가 우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섭니다. 바람은 눈썹이 뜯겨나갈 정도로 불어가고 파도는 사자의 울음처럼 높습니다.

돌아와 천천히 술을 마십니다. 지붕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습니다. 창문을 열고 파도소리도 듣습니다. 밤이 깊어 어디 전화 한통 걸 데가 없습니다. 신(神)이 없는 나는 이러다 밤을 섬기게 될 것 같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의지할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말이지요.

아침 늦게 일어나 해녀의 집으로 갱이죽을 먹으러 갑니다. 제주도 전역에서 갱이죽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이곳 섭지코지 해녀의 집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위 틈에서 돌아다니는 작은 게(갱이)들을 잡아서 절구에 샅샅이 빻아 삼베로 즙을 짜서 끓인 죽입니다. 제주도 토속 음식이라고 하는데 이젠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누런 연두빛의 죽은 매우 고소하고 담백한 맛에 몇 마리나 갈아넣었는지 모르지만 국물이 진득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즐겁게 먹을 수만은 없는 음식입니다.

그 예쁘고 앙징맞은 게들이 제멋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주린 인간의 손에 거두어져 절구에서 통째로 빻아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명치 끝이 아려옵니다.

이 토속 음식이 사라진 데는 아마 그런 이유가 보태어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도 하나의 우주이며 완전한 전체일 것입니다. 아무튼 죽사발에 숟가락을 담그며 뿌연 유리창 너머로 일출봉을 바라봅니다.

지난밤에 그토록 바람에 시달렸건만 저 장엄하고 아름다운 분화구는 내색조차 없습니다.

해녀의 집을 나와 안집 아저씨를 만나볼 겸 가까이에 있는 해양훈련원을 찾습니다. 여기엔 주인 아저씨가 목조주택을 지을 때 인테리어 목수일을 해준 김동신이라는 40살 된 독신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수일은 부업이고 그의 본업은 윈드 서핑입니다. 160센티미터나 될까말까한 왜소한 체구에 인상이 독특합니다. 갈기머리에 꼭이 작은 표범 같습니다.

이 사람은 작년에 서핑 보드를 타고 한국인 최초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까지 간 사람입니다. 무려 열여덟 시간 동안 파도와 어둠과 추위와 싸우며 말입니다. 처음에 그런 계획이 알려지자 다른 서핑 전문가들조차 미친 짓이라고 하며 돌아보지도 않더라고 합니다.

지역 신문에서조차 제대로 다루지 않을 정도로 무모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몇몇 동료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외로이 서핑 보드에 올라타 다음 날 일본에 도착합니다.

그가 제주를 떠나 1박2일에 걸쳐 작년 10월 19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을 때 일본 언론들은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하며 그를 신화적인 인물로 만들어놓습니다.

왜 그곳이 한국이 아니고 일본인지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을 정복한 진짜 남자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던 것입니다.

서핑 슈트를 입은 까만 얼굴의 김동신 씨를 만나 바다 앞에서 십여 분 애기를 나눕니다. 그러다 한번 서핑하는 걸 보여달라고 하자 모래언덕을 날쌔게 뛰어내려가 보드에 올라탑니다.

이어 고속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그는 청자빛의 바다를 가로지르고 파도를 가볍게 뛰어넘으며 까맣게 눈에서 멀어져 갑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그가 돌아오기 전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슬슬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오다 옆집 할머니를 만납니다. 그이는 이제 칠순이 다 되어 가는데 이 동네에서 태어나 평생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태어난 바로 그 집에서 말입니다.

그이는 단 한번도 육지에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바로 코앞에 있는 성산 일출봉조차 올라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고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힘들게 높은 덴 뭐러 올라가?"

얼핏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저는 이 애기를 듣고 좀 무서웠습니다. 그이의 영토는 평생 몇 평이었고 그것도 다 쓰러져 가는 움막이었습니다. 거기서 태어나고 살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아들 둘을 서울대 법학과와 수학과에 진학시켜 해삼전복으로 졸업을 시켰습니다.

법학과에 진학했던 아들은 운동을 하다 제적당하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졸업장을 받은 모양이고 지금은 강남 대치동에서 학원 선생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어머니인 그이는 아무리 봐도 시골 무지렁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어떤 신의 그림자나 조각보다 그이가 더욱 무섭고 단단하고 깊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저 일출봉 같은 부동! 비바람도 눈보라의 추운 밤도 배고픔도 그이를 쓰러뜨리거나 고뇌하지 못하게 한 그 부동의 육중함!

이 모든 것들 앞에서 우리는 때로 침묵하게 됩니다. 밤 갈대길을 홀로 가는 망아지. 검은 왕관처럼 생긴 밤바람 속의 거대한 분화부. 저 자디잔 생명들을 빻아 만든 갱이국 한 그릇. 김동신이라는 이름의 어떤 독신 남자.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거친 무명의 옆집 할머니.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오감으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을 수다스럽게 지워내며 살아갑니다. 말, 곧 언어는 그저 기호 체계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 표현 방법이나 체계가 다른 것입니다.

소리와 색깔과 맛과 촉감과 풍경으로 육박하며 다가오는 진실은 결코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 때문이든 때로 가슴 벅차올 때 고요히 몸과 마음을 열고 자유처럼 자신을 버려두기도 하는 법을 좀더 배워야겠습니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처음 옷을 벗는 여자처럼 세계의 비의를 전적으로 끌어안고 목매어 살아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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