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잡스의 죽음을 그의 창조물 통해 알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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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현지시간) 숨진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오른쪽)가 지난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애플 세계개발자회의에 부인 로런 파월 잡스와 함께 참석했을 때의 모습. 당시 그는 애플의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인 ‘아이클라우드’를 소개했다. [샌프란시스코 게티이미지=멀티비츠]

“항상 갈망하라, 항상 무모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5일 타계한 스티브 잡스(56)는 6년 전 스탠퍼드대 졸업식 기념사에서 이미 자신의 묘비명이 되어도 좋을 말을 남겼다. 잡스는 그 자리에서 자기 삶의 세 가지 전환점에 대해 말했다. 자퇴·실직·암 선고. 하나같이 불행과 절망의 기운이 서린 사건들이다. 한데 잡스는 말했다. “바로 그 일들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첫 전환점은 리드대를 입학 6개월 만에 그만둔 것이다. 그는 “평범한 노동자인 양아버지가 힘들게 모은 돈을 몽땅 갖다 바칠 만큼 (대학 공부가) 가치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잡스의 생모는 아버지의 반대로 시리아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홀로 그를 낳았다. 생모에게 “꼭 대학에 보내겠다”며 잡스를 입양한 폴과 클라라 부부는 성심으로 아들을 키웠다.

 자퇴한 잡스는 캘리그래피(서체학) 같은 흥미로운 과목을 청강했다. 힌두교에 심취해 인도를 순례하고 컴퓨터에 빠졌다. 그는 “자퇴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당시 청강한 수업 덕분에 매킨토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체를 지닌 PC가 됐다”고 말했다.

 잡스는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알토스에 있는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했다. 다섯 살 위인 ‘동네 형’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였다. 애플은 승승장구했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이 회사 슬로건은 시대적 구호가 됐다.

 두 번째 전환점은 85년 찾아왔다. 잡스는 자신이 18개월이나 공들여 영입한 최고경영자(CEO) 존 스컬리에게 쫓겨났다. 잡스가 야심 차게 내놓은 새 PC는 그 혁신성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로소프트·IBM 연합군에 대패했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며 ‘자신의 벤츠를 거리낌 없이 장애인 주차구역에 댈 수 있는’(포춘) 인간인 잡스를 옹호해 줄 이는 없었다.

 10년 공들인 회사를 잃은 서른 살 청년은 모든 걸 새로 시작했다. 컴퓨터개발사 넥스트,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멋지게 재기했다. 이 시절 잡스 인생의 진정한 절정은 아내 로런 파월과의 만남이었다. 로런은 명석하고 합리적이며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게다가 잡스처럼 채식주의자였다. 둘은 91년 결혼해 세 남매를 낳았다. 로런은 잡스가 21세 때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리사, 잡스가 한때 “내 자식이 아니다”며 냉정히 내쳤던 그 소녀까지 데려와 살뜰히 돌봤다.

 97년 잡스는 무려 18억 달러의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에 임시 CEO로 복귀했다. 그는 회사를 1년 만에 흑자로 돌려놨다. 2000년엔 정식 CEO가 됐다. 욱일승천하던 2003년 잡스는 인생의 세 번째 폭풍과 만났다. 췌장암 선고였다. 그는 수술을 받았고, 재기했고, 스탠퍼드대 졸업식 강단에 섰다. 이후 연이어 선보인 아이폰·아이패드는 세계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꿨다. 그는 만인 앞에서 거리낌 없이 외쳤다.

 “우주를 놀라게 하자!(Make a Dent in the Universe!)”

 올 8월 24일 잡스는 애플 CEO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42일 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 길지 않은 생을 ‘압축 파일’처럼 살았다. 지구촌 곳곳의 수많은 이들은 출근길 버스 속에서, 퇴근길 지하철에서 잡스의 ‘창조물’인 아이폰·아이패드를 통해 그의 죽음을 알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의 삶에 그보다 더 큰 찬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의 생부인 존 잔달리(80)는 결국 아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그의 사망 소식을 들어야 했다. 미국 네바다주 리노의 붐타운호텔 카지노 부사장으로 일하는 잔달리는 아들인 잡스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5일 “(아들 사망 소식을) 알고 있다”면서 “아무 할 말이 없다”며 모든 인터뷰를 거부했다.

 아내 로런은 남편을 떠나보낸 날 가족 웹사이트에 이런 글을 올렸다. “공적 인생에서 스티브는 선지자(visionary)였다. 사적인 삶에서 그는 (다만) 가족을 아끼는 남자였다.” 버려진 아이, 독선적 보스, 악마적 천재. 세상이 붙인 수식어는 많지만 그의 마지막은 결국 ‘패밀리맨(Family man)’이었다.

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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