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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왕이 되실 분” … 그것은 파멸의 속삭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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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셰익스피어


요즘처럼 보궐선거와 총선이 다가오는 시점이면 정치인들의 점집 출입이 잦아진다 한다. 경기침체 속에 답답한 심정을 점집에서 푸는 일반인도 많다. 며칠 전에는 한 남자가 무속인을 찾아갔다가 “3개월 안에 관재수(관청에서 재앙 받을 운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격분해 칼을 휘두른 사건도 있었다. 그는 곧바로 경찰에 끌려가서 ‘관재수’ 예언을 아주 신속하게 실현했다. 사실 예언을 맹신해 좋을 일은 별로 없다. 나쁜 예언이면 불안감으로 일을 망치고 좋은 예언이면 무모함으로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예언에 휘둘려 스스로를 파멸로 내몬 대표적인 이야기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Macbeth·1603~07)』가 있다.

그림 ① 맥베스와 세 마녀(1855), 테오도르 샤세리오(1819~56) 작, 캔버스에 유채.


스코틀랜드 덩컨(Duncan) 왕의 사촌이자 뛰어난 무장(武將)인 맥베스는 승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세 마녀를 만났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샤세리오는 이 장면을 낭만주의 미술 특유의 분방하고 풍부한 색채로 재현했다(그림 ①). 원작에 충실하게 하늘은 먹구름으로 컴컴하고 천둥·번개가 야릇한 빛을 비추는 가운데 마녀들이 맥베스를 향해 “글래미스의 영주!” “코더의 영주!” “장차 왕이 되실 분!”이라고 외치며 만세를 부른다. 아직 글래미스의 영주일 뿐인 맥베스는 경악한다. 마녀들은 또 맥베스와 동행하던 무장 뱅코에게 그는 왕이 되지 못하나 자손은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곧 덩컨 왕의 사자들이 와서 왕이 맥베스의 전공(戰功)을 기려 코더의 영주로 봉했다고 알려준다. 맥베스가 마녀들의 말이 맞았다고 감탄하자 뱅코가 경고한다. “흔히 암흑의 앞잡이들은, 우리를 해치기 위해, 하찮은 일에는 진실을 말해 우리 마음을 사고, 가장 중대한 순간에는 배신하지요.” 이것은 오늘날에도 경계해야 할 사기꾼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이미 마녀들의 휘황찬란한 예언에 잠재된 야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맥베스에게는 그 경고가 들리지 않았다.

 덩컨 왕이 장남 맬컴을 태자에 봉하자, 맥베스는 예언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반역을 감행하라는 계시로 해석한다. 게다가 마침 왕이 맥베스의 성을 방문해 하루 묵겠다고 하니, 운명이 시해(弑害)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처럼 막연한 예언에 발동한 탐욕 때문에 예언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 비극이 일어난다. 왕이 성에 도착했을 때 맥베스는 최후의 올바른 조언자인 자기 양심(良心)의 속삭임을 듣고 망설인다. 그러나 맥베스 못지않게 검은 야심으로 가득한 부인 의 다그침을 받고 다시 결심을 굳힌다.

 결국 맥베스는 한밤중에 잠든 덩컨 왕을 시해한다. 그러고는 유명한 독백을 한다. “넵튠(바다의 신)의 대양이라면 이 피를 내 손에서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이 내 손이 광대한 바다를 물들여 푸른 물을 붉게 바꾸리라.” 한편 맬컴 태자와 그의 동생은 덩컨 왕의 시해가 신하들의 공모라고 생각해 급히 국외로 피신한다. 그러자 혐의는 왕자들에게 돌아가고, 그들을 제외한 가장 가까운 친척인 맥베스가 왕으로 추대된다.

 하지만 소원대로 왕과 왕비가 된 맥베스 부부는 불안과 허무감에 시달린다. 맥베스는 이게 다 뱅코의 자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불안으로 병든 영혼은 예언을 광신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죄악을 부르는 것이다. 맥베스는 “악(惡)으로 시작한 일은 악으로 강해져야 하는 법”이라고 말하며 자객을 보내 뱅코를 암살한다. 그러나 곧이어 열린 연회에서 남들에게는 그저 빈 좌석으로 보이는 의자에 뱅코의 유령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떤다. 스스로 악의 구렁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지만 죄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림 ② 투구 쓴 머리의 환영에게서 조언을 듣는 맥베스(1793), 헨리 퓨슬리(1741~1825) 작, 캔버스에 유채.


 이처럼 사악하고도 연약한 인간인 맥베스는 다시 예언을 갈구한다. 그가 마녀들을 찾아가자 그들은 가마솥에 독사의 갈라진 혀, 살인자가 교수대에서 흘린 기름땀 등 괴이한 재료를 넣어 끓인다. 그러자 솥 속에서 환영이 나타난다. 스위스 출신 영국 화가 헨리 퓨슬리는 이 장면을 원작의 묘사에 걸맞게 음침하고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냈다(그림 ②). 이 그림에서처럼 첫째 환영은 투구를 쓴 머리였는데, 반항적인 영주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둘째 환영인 피투성이 갓난아기가 나타나 “여자가 낳은 자는 아무도 맥베스를 해칠 수 없다”고 한다. 셋째 환영은 나뭇가지를 들고 왕관을 쓴 소년으로, “맥베스는 결코 정복되지 않으리라, 버넘의 큰 숲이 움직이지 않는 한”이라고 말한다. 맥베스는 “유쾌한 예언이다!”라고 외친다.

 하지만 맬컴 왕자와 맥더프가 이끄는 반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전황은 맥베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설상가상으로 유일한 동지였던 맥베스 부인이 죄의식에 시달리다 미쳐 목숨을 끊는다. 이때 맥베스에게 버넘의 숲이 움직인다는 놀라운 보고가 올라온다. 이것은 사실 맬컴의 반란군이 나뭇가지로 위장한 채 이동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그래도 예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맥베스는 여자가 낳은 자에겐 지지 않는다고 외친다. 그러자 맥더프가 나서서 비웃으며 자신은 달이 차기 전에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왔다고 말하고 맥베스를 죽인다.

 그러니까 마녀의 가마솥에서 나왔던 피투성이 갓난아기의 환영은 제왕절개로 태어난 맥더프였고 나뭇가지를 들고 왕관을 쓴 소년의 환영은 맬컴 왕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이 환영들은 솥 속에 들어간 독사의 혀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예언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예언이라는 것은 고대 그리스 델포이 신전의 애매모호한 예언부터 시작해서 언제나 이중·삼중적 해석이 가능하며 그것에 매달리는 인간을 농락하곤 한다. 그런 예언에 놀아나며 악행을 거듭하는 맥베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인간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 속성이 없지 않기에. 셰익스피어는 맥베스를 내세워 경고한다. 약(弱)은 악(惡)을 낳는다고. 즉 탐욕과 예언에 취약한 인간 속성은 악행과 스스로의 파멸을 가져온다고.

문소영 기자

매혹적 광기 … 맥베스만큼 주목받는 맥베스 부인

맥베스 부인으로 분장한 앨런 테리(1889), 존 싱어 사전트(1856~1925) 작,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 브리튼, 런던.


19세기 말 미국 출신의 인기 초상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작품 중에는 맥베스 부인을 연기하는 여배우 앨런 테리(1847~1928)를 그린 것이 있는데, 맥베스 부인의 캐릭터에 철저히 동화된 모습이다. 황홀경에 빠져 그토록 갈구하던 왕관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사악한 광기가 풍기면서도 매혹적이다. 맥베스 부인은 맥베스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로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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