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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인 교류 확대로 한·일 벽 허물자"

중앙일보

입력

서울예술제 예술감독 손진책(53)과 일본 신국립극장 예술감독 직무대행 구리야마 다미야(栗山民也r487)가 지난주 대학로에서 만났다.

구리야마씨는 오는 7월 예술감독 정식 취임에 앞서 한국 연극계를 살피려고 내한했다.

그는 1998년 개관한 일본 현대연극의 중심인 신국립극장의 작품 선정권을 쥐고 있다.

손씨 또한 국내 최고의 연극잔치인 서울연극제 무대부문을 책임지고 있다. 그들이 가슴을 활짝 열었다.

손씨가 처음부터 핵심을 찔렀다.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최근 왕래가 잦아졌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엄존한다. 불행했던 양국의 과거를 정리하지 않으면 진정한 교류는 요원하다."

구리야마씨는 주저 없이 답한다.

"공감한다. 한 사람의 일본 연극인으로서 책임을 절감한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양국 교류는 명분에 치우친 느낌이다."

손씨가 되받았다.

"말이 통한다. 이제 양국은 벽장 속에 숨겨 놓은 얘기 보따리를 꺼내야 한다."

구리야마씨도 만만찮다.

"내년 5월 '시대와 기억'을 주제로 창작극 다섯 편을 신국립극장에서 공연한다. 그중 하나로 '도쿄재판'을 올린다. 일본의 태평양 전쟁 책임을 묻는 작품이다."

대화는 일사천리로 계속됐다. 교류라는 딱딱한 말 대신 현장에서 뛰는 연극인의 자연스런 왕래를 강조했다.

"내가 대표로 있는 극단 미추에서 연출을 맡았으면 좋겠다. 문화교류는 곧 인간교류다. 공연 자체보다 공연에 이르는 과정이 소중하다."

구리야마씨가 익살스럽게 대답한다.

"예술감독 임기에 제한이 없어 그럴 시간이 있을까.(웃음) 그러나 가까운 시간 안에 공동작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2002년 4월께 한국 희곡을 일본인이 연출하고, 일본 희곡을 한국인이 연출해 신국립극장에서 공연할 것이다. 좋은 성과를 기대한다."

얘기는 아시아 연극의 미래로 이어졌다. 마당극을 대중화하며 우리 고유의 연극양식을 찾아온 손씨와 비슷하게 구리야마씨도 와세다(早稻田)대에서 일본 전통 가면극인 노(能)를 공부하는 등 전통의 현대화에 관심이 크다.

이번엔 구리야마씨가 말문을 열었다.

"일본의 노엔 쓰즈미(鼓)란 악기가 나오는데 그 악기소리 중간의 정적이 압권이다. 고요함도 훌륭한 연극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선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손씨가 무릎을 친다.

"그렇다. 동양화의 특징도 여백이 아닌가. 탈춤에서도 박자와 박자 사이 공백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이제는 지나친 서구지향을 반성해야 한다. 서양연극은 인물·대사가, 동양연극은 음악·장면이 중심이다. 그만큼 동양연극은 제의(祭儀)적 성격이 강하다. 서양이 논리를 앞세운다면 동양은 논리를 초월한다. 서양의 합리성과 동양의 제의성을 버무려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작품을 내놓자. "

양국 연극의 차이점도 거론했다.

"일본연극은 정교하다. 한국연극이 대륙적 기질을 바탕으로 활달한 반면 일본은 정적이고 섬세하다. 특히 제작·연출의 분리가 활성화한 일본의 전문시스템이 부럽다." (손진책)

"한국은 배우들의 집중력이 대단하다. 연극협회를 축으로 한 탄탄한 조직도 일본에선 찾기 어렵다. 연극이 TV 드라마처럼 유약해지는 것이 일본의 문제다." (구리야마)

두사람은 서로를 동지로 표현한다. 양국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작품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친형제 같은 분위기였다.

한·일은 그렇게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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