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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와 공중부양의 차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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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박승희
워싱턴 특파원

조지워싱턴 메모리얼 파크웨이를 달려 워싱턴 DC에 들어서자마자 링컨 기념관을 지난다. 멀리 제퍼슨 기념관을 보면서 로널드 레이건 빌딩에 도착해 점심식사를 한다. 우드로 윌슨 센터에서 열리는 한 싱크탱크의 북한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다…. 미국에서 산다는 건 사람의 이름을 딴 도로, 건물과의 친숙해짐이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역사를 존중하며 조상의 이름을 남긴다.

 대통령 박물관 사이트에서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유적지가 미 전역에 몇 개나 되는지를 검색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지방도로에 붙여진 워싱턴 애비뉴나 스트리트 등을 빼도 144곳이다. 그중엔 코네티컷주의 레핑웰 인(Leffingwell Inn)도 있다. 1701년에 문을 연 이 ‘여관’은 순전히 워싱턴과 그의 부대원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라는 이유로 유적지가 됐다. 재임기간이 1년 남짓 했던 제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조차 생가, 유년시절의 집, 묘지 등이 남아 있다.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기록하고 남기는 게 미국인들이다. 리처드 닉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중도 하차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닉슨 기념관은 올 3월 확장 개관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의 녹음테이프와 자료들을 추가하면서. 팀 나프탈리 기념관장은 “국민들은 당파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대통령 기념관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명쾌하게 말했다.

 미국인들의 ‘이름 남기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의회 회의실에 들어서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게 위원장석 뒷벽에 걸린 선배의원의 대형 초상화다. 9월 22일 하원 세입위원회 회의실에선 한국전 참전용사인 찰스 랭글 의원의 초상화를 전시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는 정치자금 모금 규정 위반과 소득신고 누락으로 윤리위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흑인 의원들의 모임인 블랙 코커스의 창립멤버인 데다 1971년부터 40년간 의회를 지켜왔고, 1986년 ‘랭글 개정안’으로 불리는 남아공 인종차별 철폐 법안을 성안시킨 공을 더 크게 인정받았다. 81세 노정객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이런 미국에 비하면 우리의 이름 남기기는 인색하기가 사해 바닷물 같다. 불세출의 야구선수 최동원은 죽어서야 세인들의 늦은 관심을 받고 있다. 산악자전거 종목까지 미국이 명예의 전당을 ‘남발’하는 반면, 우리는 600만 관중에 30년 역사가 넘는 프로야구조차 이광환이란 야구인이 서귀포에 만든 명예의 전당 수준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그저 있는 게 아니다. 내 이름을 딴 도로나 기념관이 생기고, 국회의사당 회의실에 초상화가 걸릴 수 있음을 떠올린다면 과연 의사당 안에서 공중부양을 하고, 쉽게 해머와 소화기를 휘두를 수 있을까.

박승희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