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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Shot]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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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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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모신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 저 살창으로 스며든 빛과 바람이 고려대장경 1000년을 지켜왔다. 팔만대장경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부처님 말씀이 새겨진 경판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경판을 담은 그릇, 장경판전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교의 모든 경전을 한자로 번역해 집대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목판 대장경인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1011~87년 판각) 경판은 전란 중 모조리 불탔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1236~51년 다시금 대장경을 조성한다. 그것이 재조대장경, 이른바 팔만대장경이다. 800년 가까운 세월, 8만여 장 경판이 어제 새긴 듯 고스란히 보존된 것은 장경판전 건축에 담긴 과학 덕분이다. 콘크리트 만능주의가 맹위를 떨친 1970년대, 팔만대장경도 신축 콘크리트 판전에 보관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옮겨 간 경판은 오래지 않아 뒤틀리기 시작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해발 700m 지점에 있다.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로운 심산유곡(深山幽谷). 그러나 여름 평균 습도 89%, 겨울 평균 76%에 달하는 고습한 기후를 보인다. 목판이 습기를 먹어 뒤틀리고 벌레 먹기 십상인 열악한 조건이다. 장경판전은 열악한 환경을 역으로 활용하도록 설계됐다. 벽면 아래위 살창의 크기 및 건물 앞·뒷면 살창의 크기가 다르다. 창으로 스며든 계곡의 바람이 실내에서 아래위로 최대한 돌아 나가도록 한 것이다. 바람은 습기를 씻어낸다. 가야산의 높은 봉우리 때문에 해인사에는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판전의 처마는 길게 뻗어 나와 빗물을 막고, 직사광선을 가린다. 살창으로 잔잔히 스며든 빛과 바람이 경판을 살아 숨쉬게 한다. 해인사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다. ‘광명(光明)의 부처’를 뜻한다. 누구의 마음에나 부처가 있지만 진리, 즉 빛이 없는 무명(無明)이라 중생의 삶을 살 뿐이라는 가르침을 전한다. 부처님의 말씀, 진리가 새겨진 대장경은 곧 빛이다. 1000년 진리의 빛을 지켜온 장경판전 살창으로 빛과 바람이 스민다.

해인사(합천)=글 이경희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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