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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선심성 사업에 구멍 뚫린 예비 타당성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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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개발연구원(KDI) 공공투자관리센터는 국고 지원 300억원 이상인 사업을 대상으로 예비 타당성 조사를 하는 곳이다. 정부는 그 덕분에 해마다 2조~3조원의 예산을 절감한다고 자랑한다. 1999년 이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사업 추진 부서가 자체적으로 타당성을 조사했으니 혈세 낭비는 불 보듯 뻔했다. 물론 예비 타당성 조사도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업일수록 그 그물을 교묘하게 피해 나가기 때문이다. 4대 강 사업 같은 재해 예방 사업과 특별법으로 추진된 세종시는 아예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받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예비 타당성 조사 제도가 이제는 사실상 뇌사 상태에 빠졌다. KDI가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사업 타당성 조사에서 ‘사업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은 국책사업 10건 중 4건이 강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2년간 KDI의 예비 타당성 조사에서 비용편익(B/C)이 1.0을 밑돈 국책사업이 249건(124조원)에 달했지만, 이 가운데 38%에 해당하는 94건(51조3000억원 규모)의 사업은 그대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통상 B/C가 1.0 미만이면 사업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이 수치가 0.159에 그쳤던 울릉도 사동항 2단계 사업은 사업비 3122억원을 들여 강행했다. 이 수치가 0.210에 불과했던 포항~삼척 간 고속도로도 4조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정치적·정책적 판단에 따라 꼭 필요한 경우는 다소의 사업성을 희생시킬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객관적 기준인 예비 타당성 조사 결과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아 버리는 관행을 끊지 않으면 나라 곳간이 성할 수 없다. 이러니 ‘실세(實勢) 예산’ ‘형님 예산’이라는 비난을 사는 것이다. 거대 공약 사업일수록 전문가들의 사전 심판 기능이 중요하다. 정치인들이 선심성 사업을 남발하고,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 기를 쓰고 비효율적 사업을 강행하면 건전한 재정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조차 꿀 수 없다. 이제라도 예비 타당성 조사 제도를 강화해 정치인이 더 이상 선심성 공약은 엄두를 못 내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