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 노리코 〈맘보걸 키쿠〉

중앙일보

입력

〈맘보걸 키쿠〉는 개성적이고 파워 넘치는 3자매의 이야기 〈고고 걸스〉에 이어지는 시리즈로 둘째딸 키쿠와 그녀의 애인 토키와의 이야기다. 현대적이고 리얼하고 통쾌하되 과장스럽지 않은 것. 그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작가가 요즘 사람이어도 배경이 21세기어도 속은 고리짝 얘기를 못 벗어난 만화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무수한 여타 작품과 차별성을 가진다.

순정의 기본 구조인 잘난 왕자(든든한 배경, 매력적인 외모, 학벌)+서민 여자(평범한 집안,보편적으로 평범하다고 보는 외모)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사실 폐쇄적인 계급주의가 은연중에 강조되는 순정만화의 속물적인 세계에서 -여전히 재벌가의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발짝 물러나 있다.

의대를 중퇴한-보장된 병원 후계자의 길을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리고 미용사로 살아가는 젊은 남자를 순정 만화의 주인공으로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흔치 않다.
여주인공 키쿠도 이혼한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지 않아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겨우 예술 대학에 다니고 있다.

이 둘 외에도 등장인물 모두 개성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지독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네명 모두 아버지가 다른 여주인공의 남매들과 그들의 애인, 친구들, 회사원이나 학생, 전업 주부 등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들이 왁자지껄 떠들썩하고 쾌활하게 작품을 이끌어간다.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는 키쿠의 가족들. 그녀의 어머니는 4번씩이나 결혼한 다도 선생님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난잡함이나 설움 따윈 안 묻어 있으니 안심하고 보시길. 신파에서 탈출하고자 '혁명'을 시도한 작풍이 매력적이다.

자,이쯤에서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단순 명쾌하게 살아가는 법을 아는 인간들'이 여기에 있다.

주도적이지도 못하고 소심한 남자 주인공-토키와 레이지. 소녀적 감성을 지녔고 꼼꼼하고 잔소리 많고 결벽증에 가깝고 선병질적인 남우. 이 기묘한 매력의 드문 캐릭터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
즉 남자답다고 흔히 일컫는 든든함이라곤 없는 그와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뻔뻔하게 요구만 하되 집착은 않는 바람 같은 키쿠. 이 작품은 애인 사이인 둘이 싸우고 울고 웃고 토닥이는 과정이다.

그런데 절대 남 보기에 부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원색적이고 유치하고 발랄하니까.

결코 멋있지 않은 리얼한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사실 그간의 순정만화란 질투를 유발하도록, 다시 말하면 독자의 대리만족이 목적이 아니었던가. 필수적이었던 적당한 정도로 낯간지런 내숭 따윈 여기서 사라졌다.
대신 세련되고 상큼한 그들의 사고를 맛볼 수 있어 즐겁다.작품 만들기에 몰두해있는 키쿠를 보고 토키와가 묻는다.

"너 지금 나 완전히 잊어 버렸지?"
키쿠가 질투하는 거냐고 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바보 터프해서 다시 뿅 갔어."

믿음직하긴 커녕 툭하면 삐치기나 하는 소심한 남자와 아이같이 떼나 쓰지만 예술적인 기질만은 넘치는 여자. 특히 멋대로 긴해도 꽤나 독립적인 인간 '맘보 걸 키쿠'. 그녀의 설정은 꽤나 파격적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현재 일본에서 살아 숨쉬는 실존 인물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 하다. 그만큼 만화가 맞을까 싶을 리얼함이 존재한다.

어리석고 의심 많고 인간적인 연애기. 그것을 재기 있고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여러모로 신선한 작품답게 우리는 전복적인 시각의 즐거움을 본다.

페미니즘까지 들먹일 생각은 없지만 역시 키쿠는 전사적 자격이 충분하다. 툭하면 폭력을 쓰는 것도 키쿠고 싫증을 잘 내고 정복욕이 충족되면 뭔가 다른 신선함을 찾는 것도 키쿠다.

그에 비해 일편단심과 집착을 보이는 정숙한(?) 토키와가 있다. 끝없이 애정을 확인하고 되풀이하며 남자를 지겹게 하는 것이 여자라는 편견이 보기좋게 뒤집어 졌다고 할까?

이들의 행각은 아니 그녀의 행각은 때로는 지나치다 -우리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녀가 버젓이 애인을 두고도 단지 성적 욕구에 이끌려 가볍게 바람 피우고 요란한 관계를 아무 죄의식 없이 한다든가-.

그러나 '룰을 지키는 연인간의 용납될 수 있는 놀이'랄까.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한 연애란 저들의 문제.

이 만화는 사랑을 이타적이긴 커녕-그렇게 숭고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 자기 만족에 좌우되기 쉽다는 것을 강조한다. 키쿠는 욕망에 거스르지 않고 사는 동물적인 여자로 보이지만 솔직하고 정신 건강 하나만은 좋은 여자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사실적이되 구질구질하지 않은 작품이 나왔는지 신기하다.

그러나 모든 결론을 매력과 개성과 사랑의 발견으로 쉽게 맺어 적잖은 억지가 느껴진다.

또한 반대로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숨겨진 매력과 개성과 사랑 때문에 부족함 투성이인 사람들끼리 눈이 멀고 사랑에 중독된다 라는 해석이 신선하기도 하다.

이 작품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그를 부끄러워 않고 인정하려는 사람들의 과정을 그려내는 방식이라 정의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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