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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깨질 듯한 고통, 킬리만자로에서 ‘빨리빨리’는 독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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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06면

김종근·채승호·윤기원씨(왼쪽부터)가 6일 오전 킬리만자로의 호롬보 산장(고도 3720m)에서 출발을 앞두고 파이팅을 외친 뒤 손을 올리고 있다. 오른쪽은 이들을 이끈 산악인 김세준씨. 왼쪽 아래는 고산증으로 쓰러져 외바퀴 수레에 실린 채 현지인 포터들의 도움을 받아 호롬보 산장을 내려가는 백인 등산객의 모습. [(주)교원라이프 물망초 제공]

조용필이 부른 ‘킬리만자로의 표범’. 7080세대에겐 젊은 날의 낭만과 추억이 담긴 노래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대한민국의 중년 세 사람이 지난 3∼7일 표범처럼 킬리만자로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상을 직전에 두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대한민국 중년의 힘이자 병인 ‘빨리빨리’가 킬리만자로에선 독이 됐다. 낭만의 킬리만자로엔 복병 고산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중년들, 실패에서 삶의 지혜 배우다

김종근(52)·윤기원(54)·채승호(46)씨의 킬리만자로 등반은 ㈜교원라이프 물망초에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중년 남성들에게 청춘의 꿈을 되살리게 하자는 ‘중년의 도전’ 캠페인으로 성사됐다. 이들을 이끌 등반대장으로 산악인 김세준씨가 뛰어들었다.

3일 오후 3시 킬리만자로 국립공원 입구의 마랑구 게이트. 자신감 넘치는 대화가 이어진다. “부지런히 정상까지 올라가자”(윤기원), “나를 시험해 보겠다”(채승호). 세 사람은 이곳에서 만다라 산장(고도 2700m)까지 12㎞를 걷는 첫날 코스부터 과속했다. 입구 표지판엔 ‘3시간 거리’라고 적혀 있었지만 30분을 단축해 2시간30분 만에 올랐다. 열대 숲을 지나며 나타나는 기이한 나무와 꽃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휴식도 딱 한 차례뿐이었다. 킬리만자로 등반에 성공했던 여행가 한비야씨가 저서에서 “무조건 처음부터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 천천히 걸으며 경치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라”고 조언했던 것과는 반대였다.

킬리만자로에서 ‘빨리빨리’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고산증 때문이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기압이 낮아져 산소량이 줄어든다.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호흡 곤란이 오고 입술이 새파래진다. 설사·구토가 동반되거나 졸음이 몰려온다. 심각하면 폐수종 등으로 사망한다. 이를 경고하기 위해 마랑구 게이트엔 ‘고산 적응을 위해 천천히 움직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만다라 산장에 도착하니 숙소는 네 사람씩 들어가면 꽉 차는 미니 오두막(hut) 두 곳이다. 밤이 되자 추위가 닥쳤지만 난방도 전기도 없다. 모두 오리털 점퍼를 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오전 6시 김 대장이 조언한다. “오늘부터 세수는 금지한다. 고산에선 찬물에 씻다가도 갑자기 몸에 이상이 온다.” 산에서의 양치질도 이날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첫날 과속의 후유증인 고산증은 이날 오후 시작됐다. 오전 산장을 나서 고도 3000m를 넘기자 식생이 바뀐다. 숲은 사라졌고 관목도 허리에서 무릎 높이로 낮아지는 동시에 숨도 가빠졌다. 멀리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이 보이기 시작한 기쁨은 금세 두통과 졸음에 자리를 내줬다.

 “3300m 지점이었다. 은근한 오르막이라 쉽게 여겼는데 어느새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그렇게 30여 분을 걷는데 다리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채승호) “3000m를 넘기고선 갑자기 졸리며 한숨 잤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이 계속됐다.”(김종근)

윤씨만 상태가 괜찮았다. 고산증을 예고한 것은 이날 아침 식사 자리의 분말 커피 캔이었다. 뚜껑을 여는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 가루가 용솟음쳤다. 평지였으면 가만있었을 캔의 내용물이 2700m 고도에선 바깥과의 기압 차 때문에 터져 나왔다.

오후 4시 숙박지인 호롬보 산장에 도달했다. 해발 3720m다. 독일·나미비아·일본 등 전 세계에서 온 등반객들로 북적였다. 10여 채의 막사와 텐트 아래로 운해(雲海)가 펼쳐졌지만 일행은 피로와 고산증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이를 눈치챈 김 대장이 “모두가 긴장했고 피로하다. 서로 말을 조심하자”고 당부했다. 그런 일행을 밤새 각국 여행객들이 괴롭혔다. 이날 배정받은 숙소는 공교롭게도 1층에 식당이 있는 막사의 2층이다. 새벽까지 각국 등반객들이 식당을 찾아 챙겨온 음식으로 요기하느라 소음이 끊이질 않았다. 자며 깨며 밤을 보내야 했다. 일행이 아침을 먹기 위해 아래로 내려오니 바닥에 대여섯 마리의 쥐떼가 쏜살같이 움직인다. 하지만 식당 내 누구 하나 개의치 않는다. 쥐떼에 놀라기엔 몸이 무거웠다. 일행은 등반 셋째 날인 이날 하루를 이곳에서 더 머물며 주변을 세 시간가량 오르내리며 고소(高所) 적응을 시도했다.

6일 결전의 날이다. 15㎞를 걸어 고도 4703m의 키보 산장까지 오른 뒤 수시간 눈을 붙이고, 밤에 일어나 5895m 정상까지 다시 오르는 강행군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출발 한 시간 만에 황량한 사막과 매서운 바람이 일행을 맞았다. 시야 가득 온통 모래와 자갈의 사막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를 끝없이 걸어야 할 듯한 길이 굽이쳐 올라갔다. 사방이 트였으니 바람이 내리쳤다.

장갑을 낀 손이 얼어오자 채씨는 등반 스틱을 짚는 것을 포기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스틱을 사용하는 게 걷기에 힘이 덜 들지만 손을 내놓기엔 바람이 너무 찼다. 겨울 장갑을 꼈음에도 손가락 끝이 마치 여러 개의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갑게 아팠다. 그동안 일행을 앞장서 이끌었던 윤씨에게도 감기가 왔다. 여기까지 표범이 올라왔다면 먹이가 없어 굶거나 얼어죽었을 게 분명했다.

오후 1시30분쯤 정상을 구름 속에 숨긴 킬리만자로의 경사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던 막연한 기대를 뒤엎는 순간이었다. 사막 안에 갑자기 날카로운 산이 솟아 있었다. 윤씨도 “처음 보는 순간 느낌은 ‘아! 장난이 아니구나’였다. 이렇게까지 가파를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한 시간 후 가쁜 호흡 속에 키보 산장의 막사로 들어선 일행은 일제히 침상 위로 쓰러졌다. 채씨의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이틀 전 “육체의 고통은 한때뿐”이라고 스스로를 다스렸던 그였다. 김씨도 “너무 힘들어 기도하며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했다. 오후 10시, 정상 도전을 앞둔 저녁 식사로 그동안 아껴뒀던 미역국과 햇반을 현지인 포터들이 준비했다. 하지만 대부분 식욕을 잃었다. 탈진 속에서도 김씨와 채씨가 정상 도전 의지를 분명히 하자 김 대장은 두 사람에게 진통제 타이레놀과 비아그라 50㎎씩을 먹도록 했다. 김 대장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혈액 순환을 돕는 비아그라가 고산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자정을 1시간30분 앞두고 나서는 마지막 등반길,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밤하늘의 별은 그리도 총총하다. 그러나 출발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은 땅으로 향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돼 하늘을 볼 여유가 없다. 전날 현지인 가이드 세라핀은 “키보 산장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데 6시간 넘게 걸리는데 내려오는 데는 1시간”이라고 말했다. 출발 10여 분 만에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만큼 급경사다. 일행 선두에 선 현지인 가이드는 정확히 한 발자국 간격으로 보폭을 유지한다. 그렇게 천천히 올라가는데도 뒤따르는 일행은 수십 걸음을 옮긴 뒤 자신도 모르게 멈춰 숨을 ‘헉헉’ 내쉰다. 결국 5시간여의 밤샘 산행은 정상 500m 아래에서 마감됐다. 산장으로 내려오니 새벽 5시가 가까워 온다. 산장 건물 뒤로 펼쳐진 사막의 살풍경 위로 미명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킬리만자로에 대한 사전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한다고들 했지만 어떻게 오를지 치밀한 계획도, 고산증 대비도 부족했다. 인생이나 산이나 다르지 않았다.”(윤기원) “마음은 기어서라도 오르고 싶었지만 산은 이를 허용치 않았다. 나를 낮춰야 함을 배웠다.”(채승호) “산이 허락해야 오르듯이 인생에도 순리가 있다.”(김종근)

일행은 이날 오전 몸을 추스르고 키보 산장을 나와 지난 3일 묵었던 만다라 산장까지 하루 동안 총 33㎞를 내려왔다. 당초 계획은 중도에 하룻밤을 자는 것이었지만 정상 등정이라는 목표가 사라졌으니 산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서다. 대한민국 중년은 도전에 실패한 것보다 목표 없이 멈춰 서 시간을 허비한다고 느끼는 것을 더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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