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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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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추석 연휴 뒤끝에 묘한 뉴스 하나가 매스컴을 탔다. 엽기적이라기엔 사연이 좀 짠하고, 그렇다고 미담으로 치부하기는 곤란한 방화(放火) 사건에 관한 뉴스였다. 추석 당일인 12일 오후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서 60여㎡짜리 작고 낡은 목조가옥 한 채가 전소됐다. 불을 지른 사람은 경기도 안산시에 사는 김모(45)씨. 명절을 맞아 78세 노모가 홀로 사는 고향집에 다니러 온 아들이었다. 김씨는 불을 낸 직후 경찰에 자수했다. “노모가 고향에서 혼자 지내는 것을 놓고 형제들과 논의했으나 (어머니가) 집에 남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바람에 우발적으로 일을 냈다”고 범행 경위를 진술했다. 요컨대 고향집을 태워 없애면 어머니가 외지에 사는 자식들에게 몸을 의탁할 것으로 기대해 불을 질렀다는 얘기다.

 관할 홍천경찰서의 담당자 정영훈 경장에게 어제 전화를 걸어 확인했더니 보도된 내용 그대로였다. 안산의 수도꼭지 제조업체 사원인 김씨의 부친은 사건 직전인 8월 31일 작고했다. 자식들은 당연히 혼자 남은 노모를 모시고자 했다. 약간의 알츠하이머 증세에 관절염도 있어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어머니였다. 김씨와 형·누나·여동생 등 2남2녀가 추석 연휴에 고향집에 모여 노모를 설득했다. 그러나 정든 땅에 남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추석날 다른 형제들은 각자 집으로 떠나가고, 김씨와 그의 세 자녀가 남았다. 마침 마을 초등학교에서 추석맞이 노래자랑 대회가 열렸다. 노모와 세 자녀가 구경하러 간 사이에 김씨는 마당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태우다 충동적으로 불붙은 의류들을 방 안으로 집어던졌다. 40분 만에 집이 모두 불탔다.

 불을 지른 것은 물론 범죄다. 그러나 방화만 빼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나도 이번 추석 때 형제들과 노부모가 단둘이 사는 시골집에 모여 앞으로 어르신들을 어떻게 모실지 가족회의를 열었던 처지다. 부모는 이제 시골을 떠나실 때라는 권유에 절반쯤 수긍하면서도 친구도 없는 낯선 곳에 가는 게 꺼려진다 하셨다. 직계 부모뿐 아니다. 연휴에 인사차 들른 당숙 댁은 86세 동갑내기 부부다. 당숙모는 몇 년 전부터 알츠하이머에 시달리고 있다. ‘어디서 봤더라’ 정도의 표정일 뿐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셨다. 처갓집의 장인·장모님 역시 80대 중반 연세다.

 서울의 강남이나 홍대앞 같은 거리를 다니면 세상이 온통 발랄한 젊은이들뿐인 것 같지만, 명절을 계기로 시골에서 며칠만 지내 봐도 노인들이 대세다. 그러나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712만5000명이 넘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노인층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면 사회 고령화는 더 잰걸음으로 진행될 것이다. 인구구조는 과거의 피라미드형(形)에서 항아리(鐘)형으로, 그리고 머지않아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처럼 버섯구름형으로 바뀌게 돼 있다.

 강원도 홍천 고향집에서 방화 사건을 저지른 김씨는 2남2녀 중 셋째였다. 그나마 자녀를 여럿 두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러나 뒤 세대는 사정이 다르다. 2005년에는 생산가능인구(15~64세) 8명이 65세 이상 노인 한 명을 부양하면 됐다. 지금은 6.6명당 노인 한 명이다. 앞으로 2020년엔 4.6명, 2040년 2명, 2050년에는 1.4명이 노인 1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물로 호소하든 집에 불을 지르든 여하튼 부모를 모시겠다고 나설 만한 청·장년층 자체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김씨가 지핀 불길은 초고령사회 난리판을 경고하는 일종의 봉화(烽火)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켰다는 손순매아(孫順埋兒) 설화가 나온다. 대한민국에 죄다 노인들만 모여 살게 될 먼 훗날에는 자식이 노모를 모시려고 집을 불태웠다는 ‘효도방화(?)’ 미담이 마치 전설처럼 떠돌아 다닐지도 모른다. 사회 시스템 전체를 바꾸고 고치기 전까지는.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