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개인 투자자 울리는 정치 테마주 뒷북 단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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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
경제부문 기자

얼마 전 국내 증시에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7월 중순 인터넷에 출처 분명의 사진 한 장이 떠돌아다녔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한 남자와 함께 등산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남자는 눈 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돼 있었다. 일부 게시판엔 이 남자의 입과 코가 여성의류 전문업체 대현의 신현균 대표와 비슷하다며 둘이 깊은 관계라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선 후보로 문 이사장의 지지율이 껑충 뛰어오르던 시기라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이때부터 대현의 주가는 뜀박질을 반복했다. 이런 상승세는 한 달간 이어졌다. 7월 초 1200원(종가 기준) 안팎이던 주가는 불과 한 달여 만에 세 배를 훌쩍 뛰어넘어 3800원에 달했다.

 하지만 대현 주가는 지난달 25일부터 4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며 고꾸라졌다. 인터넷에 사진 원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자이크가 없는 사진 속 인물은 대현의 신 대표와 다른 사람이었다.

문 이사장과 신 대표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더군다나 주가가 한창 오를 때 대현의 신 대표도 주식 15만 주를 팔아 큰 이익을 남겼다. 개인 투자자 사이엔 “결국 작전세력에 개인만 당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하지만 이때까지 시장 감시 기능을 담당하는 한국거래소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며칠 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증시엔 ‘안철수주’가 대거 등장했다.

안 원장이 지분 37.15%를 보유하고 있는 안철수연구소뿐 아니라 안철수연구소와 공동으로 사업을 하기로 한 회사, 안 원장과 함께 ‘청춘 콘서트’를 진행하는 박경철 안동신세계병원장이 사외이사로 있는 회사까지 일제히 상한가를 기록했다.

하지만 6일 안철수 원장과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서울시장 후보를 박 이사로 단일화하자 이들 주가는 급락했다. 6일부터는 ‘박원순주’가 활개를 치고 있다. 박 이사가 사외이사나 재단 임원으로 활동한다는 회사의 주가는 7일 일제히 상한가로 올랐다. 실적과 관련 없이 정치인과 옷깃만 스쳤다는 소문만 나면 주가는 출렁거리고 있다. ‘작전세력’이 치고 빠지면 일반 투자자가 들어가 피해를 보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수많은 증시 전문가와 언론에서 증시엔 근거도 없는 정치 테마주 천지라며 잇따라 경보음을 울렸다. 그때서야 한국거래소는 7일 “정치인과 관련된 종목의 주가가 급등하는 현상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증시 전문가는 “작전세력은 지능적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어서 단순 경고만으로는 작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요즘 증권 전문 사이트 게시판엔 “정치 테마주에 투자했다가 상투에 물렸다”는 한숨 섞인 글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한국거래소와 금융감독당국 관계자의 귀에는 뒷북 단속에 울고 있는 개인투자자의 외침이 들리기나 한 것인가.

김창규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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