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날짜도 못 잡던 ‘활’ 관객 마음 꿰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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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공기의 저항을 가르는 활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 ‘최종병기 활’의 주연배우 박해일. 단순한 스토리에 활 액션의 팽팽한 긴장감을 극대화한 전략으로 추석 극장가까지 평정할 기세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관객의 심장을 제대로 꿰뚫었다. 김한민 감독의 액션사극 ‘최종병기 활’의 기세가 무섭다. 개봉 한 달도 안 돼 5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뜻밖의 흥행이다. 올 여름 극장가는 일찌감치 제작비 100억원대를 넘나드는 대작들의 접전이 예상됐다. 한국영화 최초의 3D 블록버스터 ‘7광구’, 오토바이 액션과 특수효과가 결합된 ‘퀵’, ‘의형제’의 장훈 감독이 꽃미남 스타 고수와 만난 한국전쟁 소재 영화 ‘고지전’ 등이 제각기 ‘1000만 관객’을 노렸다.

 ‘활’은 배우나 감독, 장르 등 여러 면에서 무명(無名)에 가까웠다. 한동안 개봉 날짜도 정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뚜껑을 열자 상황은 급반전됐다. ‘퀵’과 ‘고지전’은 300만 명을 간신히 넘기거나 못 미쳤다. ‘7광구’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223만 명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한국영화 최초의 활 액션=‘활’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조선의 신궁 남이(박해일)가 여동생(문채원)을 구하기 위해 쥬신타(류승룡)가 이끄는 청나라 정예부대와 벌이는 추격전이다. 지금까지 국내 사극에서 활은 보조무기였다. 일대일 싸움에서 활과 화살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활’이 사실상 처음이다.

 ‘활’의 주인공들은 자객이 칼을 쓰듯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게임에서 장애물을 ‘클리어’하듯 적들을 제거해나간다. 바람을 가르며 휘어져 명중하는 곡사(曲射), 애깃살(보통 화살보다 작지만 속도와 힘은 못잖은 화살)과 육량시(화살촉 무게만 여섯 냥 나가는 위력적인 화살)등 특수화살은 스피드가 주는 쾌감을 증폭시킨다. 초당 최대 2800프레임까지 잡아낸다는 고속카메라인 펜텀 플렉스 카메라로 촬영한 국내 첫 사례다.

 서부극 구도를 빌려 남이와 쥬신타의 대결에 집중하는 후반부의 긴장감은 상당히 높다. 영화칼럼니스트 김형석씨는 “지난해 600만 관객을 동원한 ‘아저씨’ 이후 정교하고 세련된 액션에 눈높이가 높아진 관객들에게 경쾌하고도 섬뜩한 활 액션의 쾌감이 제대로 파고들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평이하고 전형적이라는 단점이 묻힌 건 이 덕분이다. 전찬일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청나라 부대가 절벽에서 한 사람씩 몸을 던지는 장면 등 뛰어난 액션 연출로 유지되는 극의 호흡이 최상급”이라고 평했다.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롭다=‘활’은 외세에 당한 우리 민족의 굴욕을 다루고 있지만, 이는 영화적 장치에 가깝다. 같은 사극이라도 명나라에 대항한 조선 왕실의 자주의식을 내세운 ‘신기전’(2008)이나, 주류비판과 동성애 코드를 담았던 ‘왕의 남자’(2005)와 다르다. 이는 2009년 1139만 명을 동원한 ‘해운대’ 이후 소위 ‘대박영화’의 달라진 흥행 공식을 반영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김형석씨는 “병자호란이라는 배경은 우리 민족이 고통 당했던 치욕적인 상황에서 오는 극적인 쾌감과 비장미를 위해 끌어온 장치다. 요즘 관객들은 사극이라도 역사적 의미의 유무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논란도 있다. 쥬신타 부대가 사어(死語)인 만주어를 쓰는 점, 위기의 순간 맹수(호랑이)의 습격을 받는 점 등 핵심 설정이 멜 깁슨이 연출한 할리우드 영화 ‘아포칼립토’(2006)를 빼 닮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향후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제작할 때 할리우드에서 벤치마킹할 부분과 우리만의 독창성을 제대로 살려야 할 대목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하는 숙제를 남긴 것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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