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선 72세 엔지니어도 현역…한국선 30대만 돼도 현장 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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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 구글 본사의 수석엔지니어인 전준희(사진)씨는 마흔한 살이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SW) 업계에선 보기 힘든 ‘고령’의 현장 개발자다. 지난달 말 서울 역삼동 구글코리아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구글 본사엔 72세 엔지니어도 있다. 30대 초·중반만 돼도 현장을 떠나 관리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말로 한국 SW 산업의 열악한 현실을 웅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력보다 나이·경력을 따지는 문화, 현장 엔지니어에겐 턱없이 부족한 승진 기회, 대기업이 던진 과제를 하청·재하청업체들이 ‘노가다’ 뛰듯 꿰맞출 수밖에 없는 구조. 그는 “창의적 대가(大家)들이 윗선 눈치 보지 않고 아이디어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만이 글로벌 SW 업체를 따라잡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알집’ 개발사인 이스트소프트를 공동 창업한 그는 1998년 외환위기 때 미국 실리콘밸리로 이주, 대가급 엔지니어로 성장했다. 2006년 구글에 스카우트돼 모종의 신규 프로젝트를 이끄는 팀장으로 활약 중이다. 마침 구글코리아에 파견 나와 있는 그로부터 20년간 한·미 SW 업계를 오가며 가슴 깊이 꾹꾹 눌러 담아 온 속얘기를 들었다.

 -한·미 SW 개발 현장의 가장 큰 차이는.

 “실리콘밸리에선 엔지니어로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게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을 인생 실패자로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선 5년, 7년 이상 현장 엔지니어로 일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수치다. 월급도 안 오르고, 승진도 못 하고, 20대 때처럼 늘 ‘월화수목금금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한국 SW는 ‘최대 5년차’가 만든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다.”

 -그럼, 한국 엔지니어들은 나이가 들면 뭘 하나.

 “관리자가 된다. 이때부터 그의 경쟁력은 코딩(프로그램 코드 짜기) 실력이 아니라 친절과 성실이다. 고객 입맛을 잘 맞춰 프로젝트를 따내고, 하청업체들을 물 샐 틈 없이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여 엔지니어로서의 피를 억누르지 못해 현장을 고집할 경우 ‘거지’로 살기 딱 좋다. 삼성전자·LG전자는 그나마 좀 낫지만 대부분의 국내 업체에서 개발자가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책임연구원 정도가 끝이다.”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문화와 관련 있을까.

 “20대 후반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들어간 회사는 나를 뺀 팀원 모두가 50대였다. 그중 70%가 나보다 직급이 낮았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연령별 장단점이 있다. 젊을수록 더 열정적이며 많은 시간을 일에 투여한다. 하지만 오류가 많고 종종 중요한 걸 놓친다. 이를 보완해 주는 게 경험 많은 엔지니어의 몫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날짜 맞춰!’를 외치는 이는 상급자로서 능력이 없다.”

 -구글에선 상급자가 반대하는 프로젝트도 종종 진행된다던데.

 “크롬 노트북 개발이 대표적이다. 당시 에릭 슈밋 최고경영자(CEO)는 이 프로젝트에 확신이 없었다. ‘PC 비즈니스까지 들어가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담당 개발팀장이 고집대로 밀어붙였다. 그간 한국 기업의 발전을 이끈 건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이었다. 한데 SW는 오히려 그런 게 있으면 절대 안 된다. 현장 엔지니어의 감과 아이디어를 최우선할 때 빅히트작이 나온다.”

이나리 기자

◆구글의 엔지니어 평가 시스템=구글에선 현장 개발자가 사장, 부사장급으로 승진하는 일이 왕왕 있다. 국내와 평가 기준 자체가 달라서다. 국내 기업에선 회사가 낸 문제의 답을 빨리 써내는 이가 최고라면, 구글에선 문제지 자체를 엔지니어 본인이 만든다. 물론 회사 매출을 크게 끌어올리는 게 최선이지만, 설사 제품화에 실패했더라도 회사 기술 수준을 크게 높였다면 인정을 받는다. 철저한 다면평가 시스템으로, 가장 비중이 높은 건 같은 팀 동료와 유관부서 엔지니어들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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